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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사적 제252호) 44위 성인이 탄생한 서소문 순교성지와 약현성당

 

44위 성인이 탄생한 서소문 순교성지와

약현성당(사적 제252호)

 

 

 

언제 : 2013년 2월 28일 목요일

어디 : 서울 중구 중림동 149-2

 

시간은

거리낌 없이 가고 오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우마처럼 시간에 얽매어 말없이 끌려갑니다.

 

겨울이 허덕이는 날

조선 시대 새남터와 함께 공식 처형장이었던 서소문 밖 네거리의 천주교 순교성지와 언덕 위에서

순교자의 피 흘린 처형장을 내려다보는 약현성당을 다녀왔습니다.

 

 

서소문 공원 내에 있는 순교자 현양탑

 

 

 

 

 

순교자 현양 탑은

1984년 한국 순교자 103위의 시성을 기념해 세워진 순교자 현양 탑이 철거되면서 1999년 다시 건립한 것으로,

15m 높이의 주탑과 13m짜리 좌우 대칭 탑 등 3개의 탑으로 이뤄진 기념탑에는 물이 흐르는데

박해와 죽음의 상징인 칼과 생명의 상징인 물을 대비한 것.

 

 세 개의 탑 모두 윗부분 구멍에서 가운데까지 7개의 금빛 선이 흘러내리는데

 이 선은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승리와 천주교 7대 성사(聖事)를 상징합니다.

 

 금요일 오전 10시에 이곳을 찾으면 순교자 현양 미사를 드릴 수 있는데

기념탑 가운데 새겨진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란 문구가 발길을 붙잡습니다.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벽돌로 지은 서양식 교회 약현성당은

명동성당보다 6년이나 먼저 세워졌으며

중림동 언덕에서

서소문 공원 내에 있는 서소문 순교지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1977년 국가 문화재(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고, 1998년 2월 방화로 성당 안이 거의 전소 되었으나

1년 6개월의 공사로 1999년 9월 옛 모습을 찾은 성당입니다.

 

 

 

 

 

약현성당에서 바라본 서울(좌측 빨간 버스 쪽이 염천교)

  

 

 

 

 

우측면에서 본 약현성당의 옆이 조금 튀어나온 것이 십자가 모양의 성당인 것 같습니다.

 

 

 요셉이 예수를 안고 있는 像이 있는 성당 후면

 

 

좌측에서 본 성당도 역시 조금 튀어나옴이 십자가를 형상화했군요

 

 

탐욕이 가득 찬 공룡 같은 교회가 아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약현성당 내부

 

본당은 몸채에 2개의 곁채가 딸린 라틴십자형 삼랑식(三廊式) 구조로

번잡한 장식이 없어 오히려 깔끔하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지며, 실내로 들어서면 둥근 천장 아래 제대 좌우 신자석 정면에

성 모자상과 성 요셉상을 모셨고, 벽에는 14처(십자가의 길)가 걸려 있습니다.

 

 

정면 제대 뒤쪽은 빛의 공간으로,

3개의 스테인드그라스를 통해 오색찬란한 빛이 성전을 가득 채웁니다.

 

 

성당 내부의 후면은 2층이군요.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은 약현성당 100주년 기념으로 건축

 

 

서소문 순교 성지 전시관

 

 

서소문 성지와 관련돼 3대 박해에 대한 내용과 약현성당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관 내부

 

 

옛날 신부의 예배 의복

 

 

1998년 방화로 불에 그을린 성모상

 

 

성당의 발자취

 

 

 

 

 

척화비

길이 4자 5치, 너비 1자 5치, 두께 8치 5푼의 크기로 화강석을 재료로 만들어진 비로

1871년에 전국에 세워졌다. 비석에는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이라고 작은 글자로 새겼다.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키려다가 실패한 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여 1866년 9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천 명의 교도를 처형했다.

1866년(고종 3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으로 인한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미국의 제너럴 셔먼 호 사건으로

발생한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른 뒤 대원군은 쇄국의 결의를 굳히고 온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4월을 기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요소에 척화비를 세웠다. 그러나 1882년(고종19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어 가고 개국을 하게되자 철거하거나 파묻어버렸다.

 

 

전시관 내부

 

 

 

 

 

카톨릭 신자는 아니나

우리나라 최초로 지은 서양식 건물의 약현성당이며 

또한

조선 시대 한강 변 새남터와 서소문 밖이 공식적인 사형장이라 방문을 한 의의가 있습니다.

 

 

약현성당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두 가지 이유로.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의 집이 근처에 있었고,

신유(1801년)·기해(1839년)·병인(1866년) 천주교 수난 때 44명의 천주교도가 성당 아래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로마네스크양식과 고딕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성당은

프랑스 신부 코스트(설계)와 중국인 기술자(시공), 당시 주임신부였던 두쎄 신부(감독)의 손에 의해 탄생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