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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과 서울 천년 타임캪슐-1

 

남산골 한옥마을과 서울 천년 타임캪슐-1

 

 

언제 : 2013년 2월 22일 금요일

    어디 : 서울 중구 퇴계로 34길 28 

 

정월 대보름이 모레라

전통 가옥을 찾아 우리의 옛 생활 풍습과 어렸을 적 추억에 젖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서울 남산 한옥마을을 방문하였습니다.

 

 

서울의 상징인 남산은 옛 이름을 목멱산이라고 하였으며,

도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남산이라 했습니다. 남산은 그 자연의 경치가 아름다워 우리의 조상들이 골짜기마다 정자를 짓고

 자연의 순리에 시·화로 화답하는 풍류생활을 하던 곳으로서 각종 놀이와 여가생활을 위하여

수려한 경관을 찾는 선남선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었답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천우각과 연못이 있고

 좌측은 한옥 5채가 있으며 중앙에는 남산 국악당 그리고 상단에는 서울 천년 타임캪슐이 있습니다.

 

 

이 곳 남산골 전통정원 내에는

그 동안 훼손되었던 지형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남산의 자연식생인 전통 수종을 심었으며,

계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했고, 정자·연못 등을 복원해 전통양식의 정원으로 꾸몄습니다.

 

 

천우각(泉雨閣)

 

 

정원의 북동쪽 7,934㎡ 대지에는 시내에 산재해 있던 서울시 민속자료 한옥 5채를 이전, 복원하고

이 한옥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분성격에 걸맞는 가구 등을 배치하여 선조들의 삶을 재조명 하였으며, 전통공예관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관광상품을 항상 전시·판매하고 있습니다.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서울시 민속자료 제20호)

 

 

이 가옥은 조선말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하여 경복궁(景福宮)이 중건(重建)될 때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 이승업이 1860년대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 32-6번지 있던 것을 이전, 복원하였답니다.

대문간채와 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습니다.

안채는 '丁(정)'자형이고 사랑채는 'ㄴ'자형의 평면이고

안채에서 부엌과 안방쪽은 반오량(半五樑)으로 꾸며 전후면(前後面)의 지붕길이를 다르게 꾸민것은 특색이 있는 구조이며

대청과 건넌방쪽은 일고주오량가(一高柱五樑架)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서울시 민속자료 제8호)

 

 

이 가옥은 조선말기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으로

종로구 삼청동 125-1번지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하였습니다.

'ㄷ'자형 안채에 'ㅡ'자형 사랑채를 연결시켜 ('ㄷ') 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 대청은 오량가(五樑架)이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삼량가(三樑架)입니다. 판대공(板臺工)을 사용하고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평민주택(平民住宅)의

양식을 보이고 있지만, 안방의 뒤쪽 벽, 즉 길가에 면한 부분에 사괴석(四塊石)과 전돌(塼石)을 사용하여

화방벽(火防壁)을 쌓아 집의 격조를 더 높인 것이 특징적입니다.

 

 

문간방

 

 

 

 

 

 

 

 

 

 

관훈동 민씨 가옥(서울시 민속자료 제18호)

 

 

이 집은 민영휘(閔泳徽, 1852~1935) 저택 가운데 일부였습니다.

그는 관훈동 일대 너른 땅에다 집을 여러 채 짓고 일가붙이와 함께 살았는데, 옛 터의 위치는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였습니다.

원래 집터에는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별당채와 대문간채, 행랑채 같은 집채가 있었다고 전하나 나중에 소유자가 바뀌면서

안채와 여기에 연결된 중문간채만 남기고 모두 헐려졌습니다.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할 때 남아있던 안채를 옮겨 지으면서 철거되었던 건넌방 쪽을 되살렸고,

사랑채와 별당채를 새로 지었습니다. 전체배치는 사랑채 뒤로 안채와 별당채를 구성하였으며 담과 문으로 적절하게 공간을 나눴다.

보통 서울지방 안채는 안방 앞쪽에 부엌을 둬서‘ㄱ자형’으로 꺾어 배치하는 편인데, 이 집은 드물게 부엌과 안방을 나란하게 놓았다.

 이 밖에도 고주 두 개를 세워 짠 넓고 큰 목조구조와 6칸에 달하는 부엌의 규모, 그리고 마루 밑에 뚫려 있는 벽돌 통기구 등은

당시 일반 가옥과 다른 최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독대 옆에 겨울 김치가 얼지 않도록 짚으로 움막을 만들어 김장독을 묻었던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