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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사적 제257호) 궁궐보다 더 큰 위세를 누렸던 운현궁(雲峴宮)

 

궁궐보다 더 큰 위세를 누렸던 운현궁(雲峴宮)-사적 제257호

 

 

어디 : 서울 종로구 삼양대로 464

 

운현궁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高宗)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이며,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사저로서,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입니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습니다.

 

 

 

솟을대문(노안당 출입문)

 

노안당 전경

운현궁의 사랑채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며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다.

 

노안당

'노안당'이란 현판은 공자가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 라고 한 논어의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대원군이 아들이 왕이 되어

자신의 노년을 편안하게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과 노인들을 편하게 모셔야 된다는 치국(治國)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 라고 하였으며 ,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노안당 후경

 

중문

 

노락당 전경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10칸, 측면 3칸 규모이다. 1866년(고종3)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노락당

노락당은 초익공 양식의 사대부가 건축미를 느낄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문양(불발기창호)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붕의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중도리에는 용문양이 그려져 있어 건물의 권위와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명성왕후가 부대부인 생신 축하 방문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이 높아 하늘과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 된다고 했는데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잘 나타낸 표현이다.

 

노락당 후경 

 

  

 

 

 

이로당 전경

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과 명성후의 가례가 치러진 이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하기 어려워지게 되어 1869년(고종6)에

새로운 안채로 이로당을 짓게 되었는데 정면이 8칸, 측면 7칸으로 되어 있다.

 

이로당

운현궁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건물로서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여자들만 살 수 있게 별도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철저한 금남지역으로 바깥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미음(ㅁ)자 모양으로 만들어 졌다. 이로당의 안주인은 운현궁 전체 안살림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이로당 동행각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이름 이하응(李昰應),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영조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63년 고종이 조선의 26대 임금으로 즉위한 다음 대원군에 봉해지고 섭정이 되었다.  당파를 초월한 인재등용,

 서원철폐, 법률제도 확립으로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수립하였으나,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오개혁 등으로

  하야와 재집권을 반복하였고, 복잡한 국제관계 때문에 청나라로 납치되기도 하였다.

 

운현궁

 

 교지(敎旨)

 

유물 전시관 내부

 

흥선대원군의 벼루와 먹

 

 흥선대원군의 붓

 

흥선대원군의 낙관

 

 흥선대원군의 교의

 

유물 전시관 내부

 

수직사(守直舍)

정문 우측에 위치한 행각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궁에서 관리와 경비가 파견되는 등 거주 인원이 많았다.

 

수직사 내부의 용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