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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강화) 광성보(廣城堡)

 

광성보(廣城堡)

 

 

언제: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어디: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사적 제227호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고 1679년 숙종 때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안해루 

 

 

 

 

광성돈대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와 쌍충비각(향토유적 제10호)  

 

  

 

 

 

 손돌목돈대

 

 

광성포대 

 

 

 용두돈대

 

 용두돈대

김포 덕포진과 손돌무덤이 있는 곳 

 

신미양요 때의 최대 격전지, 광성보

미국은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함대는 물치도에 정박하고 강화도해협에 군함 두 척을 파견하였다.

당시 강력한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영해침범을 경고하고 철수를 요구하였다. 미군이 아랑곳하지 않고 광성진에 접근하자

조선군은 광성, 초지, 덕진, 덕포등의 포대에서 경고용 포격을 쏘며 물리쳤다.

하지만 미군은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6월 10일에 군함을 앞세우고 군인 600여 명을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튿날은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까지 점령하였다.

6월 11일의 광성보전투에서는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장 어재연을 비롯한 49인의 장사와 200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고,

20여 명이 다쳤다. 광성보군인들의 격렬한 항전으로 미군은 이튿날 물치도로 물러가고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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