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진진(德津鎭)
언제: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어디: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사적 제226호
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로서
효종 7년(165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 주둔지 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5진 7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병인양요(1866)때 양헌수 장군의 부대가 덕진진을 통하여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때는 미국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덕진진 내에는 바다를 향해 경고비가 있는데 이는 1867년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그 내용은 '타국선은 어떠한 경우라도 함부로 이 곳을 통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덕진진의 성첩과 건물은 이때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를 복원하였다.
공조루
남장포대
덕진돈대와 경고비
경고비
초지대교
덕진돈대에서 바라본 남장포대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각(전등사 소재)
강화의 돈대(墩臺)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돈대는 성벽 위에 석재 또는 전(塼)으로 쌓아올려
망루(望樓)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높직한 누대(樓臺)다.
돈대의 형태는 원형과 방형 2가지가 있으며,
내부에는 2~3단의 마루를 만들고 외부를 향한 벽면에 각 층마다 작은 안혈(眼穴)을 내어 대포·총·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 설치의 기록은 조선시대 문헌에서 나타난다.
〈남한지 南漢志〉에 인조(1623~49 재위) 때 수축된 남한산성에 2기의 돈대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위(金錫胃)의 건의에 따라 강화에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그 명칭과 위치가 그려져 있다.
1796년 완공된 수원 성곽의 서북·남·동북의 3곳에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이를 공심돈(空心墩)이라 불렀으며 수원성(華城)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시설물이다. 현재는 서북 공심돈만이 남아 있다.
이러한 공심돈은 서양 중세 봉건제후 성의 일부인 탑과 유사한데 수원성 성역에 참여했던
정약용이 〈기기도설 奇器圖說〉을 연구한 것으로 미루어 서양 성곽을 본뜬 것으로 짐작된다.
축성연대는 53개 돈대중 49개 돈대는
조선숙종 5년 (1679년) 기미년에 유수 윤이제 재임시 어명에 의한 병조판서 김석주의 지휘를 받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삼도의 승군(僧軍) 8,9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 만에 완축하였으며
빙현돈은 숙종44년 (1718년)에 유수 권성이 축조 하였으며
철북돈은 다음해인 숙종 45년 (1719)에 유수 심현택이 축조 하였고
초루돈은 그 다음에 숙종 46년 (1720)에 유수 어유구가 축조 하였고
작성돈은 영조 (1725)에 유수 박사익이 축조하였다.
그 후 양암돈과 갈곶돈 두 돈대는 너무 오래되어 폐쇄 하였고 51개 돈대만 수호 관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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