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산성(江華山城)
언제: 2012년 9월 2일 일요일
어디: 강화도 강화산성(사적 제 132호)
고려 시대 산성으로 1231년(고종 18) 몽고의 침략을 피하여
고려 고종 19년(1232)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여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기까지
약 39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1232년에 착공되어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축조되어 13년간 성을 쌓고 개경과 비슷하게 왕궁도 짓고 뒷산도
송악으로 이름 지었다.
이 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성은 지금의 강화성으로 둘레가 약 1.2km이며,
중성은 내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중성을 둘러싸는 외성은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다.
강화도가 새로운 수도로 선정된 이유.
강화는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공격이 쉽지 않은 곳이며 수전(水戰)에 약한 몽골군의 약점 이용할 수 있으며
반면에,
고려에는 개경과 가깝고 지방과의 연결 혹은 조운(漕運) 등이 매우 편리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강화천도에 대한 평가로는 2가지 견해가 있다.
장기적으로 항몽전을 전개하려는 감투 정신의 발휘인 동시에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처사였다는 긍정적 견해가 있는가 하면,
그보다는 최우가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데 더 큰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오늘은
지금 남아있는 내성의 남문= 안파루, 동문= 망한루, 북문= 진송루, 서문= 첨화루 4대문과
암문, 수문, 장대 등을 둘러볼 예정이다.
남문(南門)
강도남문(江都南門)
안파루(晏波樓)
동문(東門)
강도동문(江都東門)
망한루(望漢樓)
점심
북문(北門)
진송루(鎭松樓)
북문에는 강도북문 현판(懸板)과 천장 그림도 없다.
북문에서 북장대 오르는 성곽길
북장대에서 본 북한과 송악산
(북장대는 아직 시설물이 없다.)
강 건너 북한땅 멀리 개성 송악산
강화도와 개성이 얼마나 가까운것을 알 수 있다.
멀리 마을도 보인다.
개성 송악산
서문(西門)
서문에도 강도서문 현판(懸板) 없다.
엣 군사훈련장
1876년 고종 13년 2월 26일 병자년 한.일 수호조약을 체결한 곳
서문에서 남장대 둘레 성곽
암문
남장대에서 본 북한과 개성 송악산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흐르다가 유도(중앙)를 사이에 두고
연미정(좌측 흰 시설물)이 있고
다시
김포와 강화도 해협인 임하강(우측 좁은쪽)과 남.북한의 경계인 서해(좌측 넓은쪽)로 흐른다.
산아래 중앙 녹지가 고려궁지
남장대에서 남문 둘레 성곽
남문
(남문-동문-북문-북장대-서문-남장대-남문=강화산성 일주)
격동기의 역사를 간직한 강화산성.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군이 고려를 침략하자 당시 무신인 최우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왕궁을 짓고 13년간 성을 쌓아
39년간 대몽항쟁을 하지만 결국 몽고군과 강화를 맺고 마는데
몽고와의 강화조건은 강화도에 세운 궁궐과 성을 허무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강화 고려궁지에는 빈 궁터만 남아있어 너무 아쉽다.
조선 16대 인조 1627년(인조 5년)
후금의 침입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때 강화도 연미정에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던 곳이며,
후금이 청나라로 국호를 바꿔 조선 16대 인조 1636년 12월 2일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하고
당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평대군은 신료들과 함께 강화성으로 피신하여 장기항전을 준비하였으나
인조가 삼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고 강화성도 청군에게 함락되고 만다.
강화성의 왕족과 신료들은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비롯해 많은 조선의 신하들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나라가 유린당하고 세자와 대군까지 볼모로 잡혀가자,
조선조정은 수차례에 걸쳐 강화산성 개축을 단행해 그같은 치욕에 대비했으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강화성은 또다시
병인양요(1866년, 프랑스)와 신미양요(1871, 미국), 그리고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1876, 일본)을
연무당에서 체결하는 등으로 역사적 격동기의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연무당-1876년 고종 13년 2월 26일 병자년 한.일 수호조약을 체결한 곳)
- 여행 후기 -
강화산성을 둘러보며 안타까운 일은
고려 39년의 수도였기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에도
고려궁지에는 좁고 빈 궁궐터만 있어 그곳을 찾은 사람은 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고
또한
강화산성은 4대문과 성곽이 일부 복원되어 있기는 하나
눈에 보이는 곳만 되어있고 눈에 뵈지 않은 곳은 무너진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물론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강화산성보다 훨씬 큰 남한산성이나 다른 지역의 성은 복원이 잘 되어있는데
남한에서 고려 역사가 남은 곳이며 큰 성도 아닌 강화산성과 고려 궁지는 왜 복원이 더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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