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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강화) 병인양요(丙寅洋搖)의 흔적이 깃든 전등사(傳燈寺)

병인양요(丙寅洋搖)의 흔적이 깃든 전등사(傳燈寺)

 

 

언제: 2011년 9월 14일(수요일)

누구: 아내

어디: 강화도 전등사

 

 

가을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밤이면 귀뚜라미가 울고 낮이면 매미가 마지막 혼을 태우는 햇살 따가운 날

아내와 강화도 마실을 나갔다가 전등사를 찾았다.

 

지금까지 몰랐던 대웅전 기둥에 씌여진 글씨들은 병인양요때 참전했던 병사들이 부처님께

그들의 안녕을 기원한 글씨라는 것을 알았고 정족산성을 한 바퀴 돌며 병인양요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며

모처럼 아내와의 마실이 정겨웠다.

 

 

전등사 남문쪽 송림

 

 

흙길을 걸으며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 

 

 

병인양요(丙寅洋搖)

1866년(고종 3) 프랑스 가 대원군 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대웅전

 

 

 

대웅전 기둥의 글씨: 병인양요때 참전했던 병사들이 부처님께 안녕을 기원한 글씨라고......

 

 

 

대웅전 옆 수조에 핀 연꽃

 

 

 

 

 

 

 

 

 

 

 

 

 

가궐터에서 본 전등사 전경

 

 

 

 

아내가 준비한 커피와 과일

 

 

 

정족산성의 서문

 

 

 

정족산성 정상에서 본 장화 저수지와 김포방향

 

 

 

정상에서 석모도

 

 

 

정족산성 정상에서 방긋 웃는 아내

 

 

 

 

 

 

북문

 

 

 

 

 

 

병인양요(丙寅洋搖)

 

1866년(고종 3) 프랑스 가 대원군 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배경

1866년 1월초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의 하나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때 탄압을 피하여 탈출했던 3명의 프랑스 신부 가운데 리델이 7월 청나라의 톈진[天津]으로 탈출해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탄압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은 1846, 1847년 2차례 조선을 침략했다가 실패했던 프랑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는데, 로즈는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한 서울까지의 뱃길을 탐사할 목적으로 3척의 군함을 이끌고 1866년 8월 10~22일에 제1차 원정을 단행했다. 프랑스 군함은 서울의 양화진·서강까지 올라와 수로탐사를 한 뒤 물러갔다.

이에 조선 정부는 황해도와 한강 연안의 포대를 강화하고 의용군을 모집하는 등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해안 방어대책을 강화했다. 같은 해 9월 15일 로즈는 전함 3척,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왔다.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경하·이용희·양헌수를 각각 대장·중군·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를 수복했다. 9월 20일 문수산성에서 다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데에는 기습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0월 1일 밤 양헌수가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몰래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잠복하여 10월 3일 정족산성을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군은 전사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가 났으나,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조선군의 정족산성 승리는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1개월이 넘는 원정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정족산성의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 등으로 10월 5일 강화도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대량의 서적·무기·금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이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의 일부가 최근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정족산성 승리의 의미

첫째, 화력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연전 연패를 하다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에 의하여 근대식 병기로 장비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둘째, 정족산성의 패전을 계기로 로즈함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강화도를 철수하였다.

프랑스군은 10월 14일 상륙이래 거의 한달 동안 강화도를 점거하였으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로하여, 야포를 동원하여 정족산성을 재 공략할 수 있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11월 10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이 싸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외규장각 이란?

1781년 정조가 강화도의 지리적 이점을 고려하여 설치한 규장각으로, 

조선 후기의 왕위 계승 및 왕실의 주요 의식, 절차 등을 기록한 왕실 의궤들을 보관하던 곳으로

왕실 관계 서적 1000여 종 6000권가량을 보관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국보급 문화재에 해당하는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일부 서적이 약탈되고 나머지는 소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