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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인천) 아! 실미도

아! 실미도

 

언제: 2011-8-31

 

바람도 비켜가고 산새 울음도 없는 곳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는데 땡볕과 매미소리만 적막한 실미도에

생명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올 여름

그냥 그렇게 보낼 수 없어 물때가 맞으면 아직 실미도를 들어가 보지 못해 무의도를 찾았는데

마침

물이 빠져 실미도를 건널 수 있었다.

 

언제였드라? 

아!

40여년 전 1971년 8월 23일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

 

실미도 사건

1971년 8월 23일 실미도에 있던 북파부대원들이

자신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하여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로 진입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 로터리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어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사건.

 

  

거잠포 풍경

 

잠진도 선착장(육지에서 무의도행 배 타는 곳)

 

 

실미 해수욕장(실미도 맞은 편에 있는 해변)

바다위의 징검다리(실미해변에서 실미도로 건너가는 곳) 

 

실미도 사건이란

 

북파목적으로 창설되었다는 실미도 특수부대의 정식 명칭은 2325 전대 209 파견대였다 고한다. 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해서 '684부대' 라고 불렀다.


특수부대 창설은 68년 김신조가 이끄는 북한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던
1·21사태에서 비롯되는데 이 사건에 분노한 박정희가 그 보복 조치로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며 부대 인원도 김신조 특공대와 똑같은 31명으로 구성되었고  훈련요원과
 동일한 수의 기간요원들이 있었다. 모든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대장과 직접 교육병들을 담당하고
 같이 행동하는 소대장, 통신병, 의무병, 보급병 등이 있었다.

실미도 특수부대는 당시 권력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북 공작책 제1국장 이철희(장영자

사건의 조범)에 의해 만들어졌고 부대관리와 훈련은 공군이 맡았다.
그들은 혹독한 지옥훈련 3개월만에 북한 주석궁을 침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실력을 갖춘다.
그러나

실미도 특수부대가 창설된지 3년 4개월만에 북파지연과 월급/대우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게 된다.

실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 직선 거리로 20 km 떨어진 무의도 옆 무인도.
중앙정보부가 당시 북파 특수부대를 훈련시킬 최적의 장소로 이곳을 지적했다.
그들은 3년4개월동안 체포되면 죽는다는 교육으로 조국 통일을 위해서는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고,

북한 침투훈련을 위해 위성사진을 본따 북한 지형의 모형(사판)을 만들어 훈련했다.
독도법 호신술 산악훈련 폭파기술 등을 배웠으며 기간요원과 훈련병 모두 처음에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김신조부대를 능가해야 한다는 각오로 산악구보를 하더라도 그들보다 1초라도 더 빨리 달렸다. 훈련중에 동료 7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실미도 특수부대원들의 기량은 최고에 달했다. 목숨을 건 훈련 3개월만에 목표물이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그들의 사격실력은 백발 백중이었다.
훈련요원과 기간요원이 함께 먹고 자면서 똑같이 생활했다.

당초에 약속했던 3개월이 지나면서 상부로부터 보급과 지원이 줄어들었고 실미도의 문제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전명령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참아온 석달. 그러나 예정되었던 68년 8월에 북한침 투 명령이 떨어졌다가 전격 취소되고

만다. 그이후 지옥같은 훈련을 3년이나 견디어 내면서 작전 명령을 기다려 왔지만 그들에게 단한번도

북파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실미도 난동사건 그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당시 실미도 밖의 상황은 남북 화해분위기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은 684 부대를 만든 장본인 김형욱에서 이후락으로 바뀌고 실미도 처리문제는 계속 미루어진다. 
국제 데탕트의 영향(미 중의 핑퐁외교등...)을 받아 남북한 역시 대화노선으로 나간다. 
이후락은 마침내 평화통일안을 천명하고 남북회담으로 이어진다. 북한 침투를 목적으로 창설한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가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내 끔찍한 최후의 날인 1971년 8월23일 새벽 6시. 탈출을 위한 훈련병들의 행동개시와 함께 실미도는 삽시간에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현장으로 바뀐다. 특수훈련을 받은 훈련병들이 일당백의 기량으로 기간병을 습격한다.

24명의 기간요원중 교육대장이던 준위등 12명이 사살되고 6명은 바다로 피하려다 익사 하였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경비병 5명과 김방일 소대장등 모두 6명.

그리고 훈련병들은 무의도에 들어가 배를 타고 낮 12시 30분경 3년 4개월간 갇혀 있던 실미도를 빠져 나와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다. 12시 53분 송도외곽에서 탈취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연락을 받고 대기중이던 육군 24명과

총격전을 벌이고, 그들이 타고가던 버스의 바퀴가 펑크나자 마주오던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한다. 


오후 2시 15분경 운전기사가 탈출하자 실미도 훈련병이 직접 차를 몬다. 대방동 로터리 유한양행앞에서 그들이 몰던 버스가

가로수에 받혀 멈춘다. 그리고는 수류탄 자폭으로 최후를 맞는다. 생존자 4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되고 이사건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영원한 미궁에 빠지게 된다. 사건발생 3일후 당시 국방장관이 전격 사표를 냄으로써 이사건은 의문을 가질 기회도

없이 종결된다.

 

 

 

 

그들도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실미도의 풍경


 

 

 

  

 

   

 

 

이곳이 막사가 있었던 곳이라네.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사람들이 실미도에서 실미해변으로 건너고 있다.  

썰물 때 실미도

밀물 때 실미도

실미 해변의 풍경

 

 

 

 

옥잠화가 곱다.

카메라에 포착된 물새 한 마리.

물이 가득한 거잠포에서 잠진도로 연결되는 연륙교

 

 

오후 2시 50분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해 실미도에서 실미 해변으로 건너와 송림의 탁자에 앉아 시원한 막걸리 몇 잔을 했더니

햇볕에 탄 얼굴이 술기마저 올라 보기 좋다.

 

준비해간 자리를 그늘에 깔고 낮잠을 청하나 

실미도의 기암들과 실미도 너머의 푸른 바다가 눈에 밟혀 잠을 이루지 못하다.

 

호우 4시쯤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해 보니 생각보다 몸이 달라졌다.

아직도 수영을 멀리할 수 있다고

아직도 저 정도는 생각했던 거리를 다 가지 못하고 헛웃음만 지었다.

 

짭짤한 바닷물 맛도 싫지 않다.

거칠어진 내 몸을 소금기 짙은 바닷물에 하루 쯤 담그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다.

다행히

바쁘다고, 시간이 없다고 올 여름 바다에 몸을 적셔보지 못했는데

후회 할 일 하나 지울 수 있어

의미있었던 하루이다.

 

2011-8-31 雨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