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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비 내리는 길상사(吉祥寺)

비 내리는 길상사(吉祥寺)

 

언제: 2011년 5월 21일 토요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아내는 회사동료와 1박2일로 강화도로 떠나고 나는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에서 내려 우산을 쓰고 길상사행 셔틀버스에 올랐다.

서울 시내에 있는데도 길상사를 방문하는 길이 너무 멀었다. 

불교인은 아니지만 법정 스님의 글을 대하며 법정 스님 생전에 길상사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는데 열반하시고도

오늘에야 길상사를 찾는데 비마저 추적추적 내린다.

 

 

 

삼각산 길상사 일주문 

 

 안쪽에서 본 일주문 

 극락전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한 길상사 본법당

아미타부처님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상보살을 모셨다.

 

 법고는 땅위의 축생을 제도하며

목어는 수중의 중생을 제도하며

운판은 공중나는 축생을 제도하는 의미이다.

 

 범종각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범종은 땅위와 하늘세계를 울려 인간과 천신을 제도한다.

 

 

 

  관음보살상

종교간 화해의 염원이 담겼다.

 

 설법전 

 극락전 지붕 전경

 

 

 

 

 길상선원

행지실(行持室)

어른스님들의 객실 혹은 접견실  

스님들의 처소 

 

 유마선방

스님들과 사중에서 일하는 불자들의 정진 처소이다.

 

 침묵의 집

누구에게나 항상 열린 공간

  

 

 길상화 공덕비

 길상헌

1999년 11월14일 타계한 그는 하루 전날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다

 

지장전(3층)과 선열당(아래층: 스님과 불자의 공양간)

 

  지장전에서 바라 본 일주문과 극락전

 

 

 

 

길상사(吉祥寺)

 

법정(法頂·78)스님이 2010년 3월 11일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지병인 폐암으로 투병해온 법정스님은 이날 낮 입원중이던 삼성서울병원에서 길상사로 옮긴직후인 오후 1시51분께 열반에 들었다. 서울 성북2동에 위치한 길상사는 1997년 세워졌다.

길상사는 본래 고급요정 ‘대원각’이었다. 80년대말까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요정으로 꼽히며 밀실정치에 이용됐던 곳이다.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1999)이

법정에게 시주해 절을 만들어주기를 청하면서 길상사가 탄생했다. 16세때 조선권번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기생이 됐던 그는 대표적 근대시인 백석(1912~1995)의 연인이기도 했다. 백석에게 자야(子夜)라고 불리웠던 그는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저술을 냈다.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당시 시가 1000억원에 달했던 7000여평 절터와 전각을 내놓았다. 사양하는 법정스님을 10년에 걸쳐 설득해 그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97년 12월14일 길상사가 개원하던 날,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 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만을 받았다. 수천 대중 앞에서 단 두 마디를 남겼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99년 11월14일 타계한 그는 하루 전날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다고 전해진다. 다비후 유골은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오후 5시에

길상사를 나와 걸어서 한성대 전철역 가는 길에 승무의 시로 유명한 시인 조지훈님이 30여년간 살았던 집터를 볼 수 있음도

이번 길상사 방문과 더불어 반가움이 더 하였다.

길상사는 한성대 전철역에서 걸어 약 20여분 소요되며 또한 셔틀버스도 운행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