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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가을 끝자락의 창덕궁과 비원(秘苑)-1

가을 끝자락의 창덕궁과 비원

 

언제: 2011-11-17(목요일)

 

가을을 보내기가 아쉬운지 전국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남부지방과 제주에만 많은 비가 내리고

중부지방은 하늘만 잔뜩 흐려 있을 뿐이다.

 

휴일,

가을 끝자락에 창덕궁 비원(秘苑)의 조선 왕들이 거닐던 숲길과 고목 그리고 많은 정자와 어우러진 올 가을 마지막 남은

단풍과 낙엽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창덕궁 나들이를 했다. 

 

 

 

돈화문(敦化門: 보물 383호)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敦化는 『中庸』의 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층 문루에 종과 북이 있어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인정문(仁政門: 보물 813호)

(좌측문)

 인정전 (仁政殿: 국보 225호 )


인정전에서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여기서 즉위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이다.
이러한 행사 때에는 인정전 앞의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했다.

 

조선의 궁궐 정전에는 공통적으로 정면에 임금의 용상(龍床)과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되면서 인정전에 전등이 설치되었다.

인정전에서 본 인정문

  

 

 

선정전 (宣政殿: 보물 814호)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이다.
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잡으며 한쪽에서는 사관(史官)이 앉아 국사에 대한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사관들의 기록을 사초(史草)라고도 하며 이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희정당 (熙政堂: 보물 815호)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는데,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 되었다.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 응접실에는 서양식 가구가 놓여져 있다. 상방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만물초승경도>,<총석정절경도>가 걸려 있다. 남행각 정문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변형되었다.

 

 

대조전 (大造殿: 보물 816호)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옮겨다 지었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경훈각은 대조전의 부속 건물로 원래는 이층 건물이었으나 1917년 화재
이후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 단층으로 옮겨 지었다.
수라간은 음식을 만들던 곳으로 내부는 조선 말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화려한 문양의 담과 문 

 

 

 

 

성정각 (誠正閣) -또는 내의원(內醫院)

성정각은 세자가 서연(書筵 : 학자들과 유교 경전을 공부)하던 곳이다.
성정각 뒤의 관물헌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원래 내의원은 인정전 서쪽에 있었는데 1910년 대부터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이용하였다.
내의원은 궁중의료기관으로 왕과 왕족의 병을 치료하고 약을 조제하던
곳으로 내국(內局)이라고도 불렀다.
내의원에는 의녀도 있었는데 이들은 남자의관에게 진찰받기 어려운 궁중
여성들의 치료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

 

 

중중희당(重熙堂)

지금의 후원과 창경궁으로 갈라지는 곳에 터만 남았으나 부속건물인 칠분서(七分序)와 삼삼와(三三窩)

(좌측건물이 칠분서 우측건물이 삼삼와)

 

중희당의 부속건물 승화루(承華樓)

 

 

 

낙선재(樂善齋)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년)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다.
이 곳은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아름다운 화계(꽃계단)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들이 돋보인다.

낙선재 정문

낙선재(樂善齋)

뒷편의 상량정(上梁亭)

 

 

 

창덕궁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이들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종묘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 5년) 궁궐 조성을 시작하여

자연환경과 탁월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 궁궐 건축과 전통 정원의 원형을 잘 간직한 궁궐로 경복궁 동쪽의 궁궐이라 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도 불렸다.

처음은 경복궁을 보조하는 궁궐로 지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복궁보다 먼저 복구되어 명실상부한 조선 제일의 궁궐이 되었으며

오백 년 역사를 놓고 보면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왕들이 머문 기간이 더 길다.

 

특히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창덕궁의 후원은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 가운데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답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규장각(왕실 전용 도서관)을

설치하여 인재를 모으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혁신 정치를 펴서 조선시대 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다.

후원의 부용지에 자리한 주합루 1층이 규장각이다.

 

그러나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궁궐로 왕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조선 왕조의 마지막 순간을 안타깝게 지켜 본 궁궐이기도 하다.

한일병합을 결정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 회의가 흥복헌에서 열렸고,

낙선재에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과 순정효황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왕(이은(李垠)은 1897년 생으로 고종의 3남이며 순종의 동생)과 부인 이방자 여사가 창덕궁에서 생활하다 생을 마쳤고,

고종이 나이 환갑에 귀인 양씨로부터 얻은 외동딸인 덕혜옹주(1912-1989)가 낙선재에서 1989년 운명을 하였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