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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전남) 백암산 고불총림 백양사(白巖山 古佛叢林 白羊寺)



 백암산 고불총림 백양사(白巖山 古佛叢林 白羊寺)

 

언제: 2009.10.27. 화요일

어디: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누구랑: 혼자

어떻게: 1박2일

 

 

깊어가는 가을날

우리나라 5대 총림의 하나인 고불총림 백양사를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오기 위해 2009.10.27. 화요일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탔다. 


여행은 역시 기차가 여행의 맛을 물씬 느끼게 한다.

화장실이나 식사를 기차 안에서 해결할 수 있으며 다른 칸을 다닐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어 좋고

도착지의 낯설음을 느끼기도 전에 기적을 울리며 떠나는 무심함 또한 기차여행의 맛이다.


중부지방의 들녘은 이미 추수가 마무리에 들어갔고 호남지방에 들어서니 군데군데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 물결이

풍요로움을 주고 푸르른 가을 하늘이 유난히 푸르게 보인다.

 

 

오후 2시 백양사 역에 도착

사거리 터미널에 백양사까지 가는 버스를 확인하니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미터요금의 택시를 타고 달리는 낯선 백양사 가는 길은 장성호를 지나며 길가의 가로수의 오색단풍이

한껏 여행의 맛을 돋구인다.


요금 12,600원 버스를 타면 1,100~2,400원이면 될 일이나 산행까지 생각하면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백암산 고불총림 백양사 일주문 

 

일주문에 서니 백암산 고불총림 백양사란 현판이 나를 반긴다.

얼마만의 인연인가?

학창시절 방학 때 이따금 기차를 타고 백양사 역을 지났어도 여태 찾아보지 못했는데 늦었지만, 이제라도 만날 수 있음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멀리 백학봉과 어우러진 일주문부터 쌍계루까지 약 3.4km의 연출되는 단풍 길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백양사 단풍은 우리나라 자생단풍으로 일명 애기단풍이라 불리고 있다. 이는 단풍잎의 크기가 작게는 어른 엄지손톱에서부터

크게는 어린아이의 손바닥만한 것까지 작고 귀엽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다.


쌍계루(雙溪樓)  

 

아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백양사를 소개하는 그림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쌍계루가 하필 철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백학봉과 어우러져 연못에 비쳐지던 쌍계루였는데......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쌍계루의 그늘에서 한숨을 돌리면 바로 ‘극락교’가 있다.

이 극락교를 지나야 비로소 사천왕문이 나타나고 백양사 경내로 들어가게 된다.


예로부터 선도량으로 유명해 수많은 높은 고승들을 배출했던 백양사는

송광사의 더불어 호남 최대의 사찰이지만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고 평범하고 수수하다.


오히려 단아하고 조용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참선하는 스님들의 독경소리에 따라 온갖 상념에

잠기다 보면 일상의 시름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다.

백양사에는 현재 국가지정문화재인

 소요대사부도 뿐만 아니라 대웅전과 극락보전, 사천왕문, 청류암 관음전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쌍계루와 부도군 사이의 길을 따라 500미터 정도 올라간 곳에 자리한 비구니의 도향

천진암,

또한 백양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약사암이 있고 그 옆 영천굴이 있다.


그 외에도 선방스님들이 자주 찾는다는 청류암과 산의 정상 가까이에 있는 운문선원이 있다.

 

 

 

  

  

성보박물관 



박물관에서 바라본 백학봉 



  

부도전 


 

 

백양사소요대사부도(白羊寺逍遙大師浮屠)
보물 제1346호 


요대사부도 백양사 입구에 자리한 부도전 내에 건립되어 있으며,

석종형의 양식을 구비한 높이 156cm 규모의 석조부도로 기단부 · 탑신부 ·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에서 최근 2002년 9월 25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대석은 하부가 매몰되어 상면만 보이고 있다.

하대석은 팔각형으로 각 면에는 초화문이 조각되었는데, 1면에만 거북 동물이 양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모서리와 각 면에 1구씩 모두 단엽 8판의 복련을 배치했는데, 간지에는 간엽을 표현했다.

상면에는 각형 1단의 받침을 조출해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석종형으로 전체적으로는 전통적인 범종의 모습과 같이

하대·유곽·상대·용뉴를 표현하고 있다. 하대는 2줄의 돌출된 선으로 윤곽을 그린 후

내면에는 게(蟹)를 비롯한 8구의 동물을 조각했다. 이처럼 8면에 동물을 배치한 것은 팔부신중을 의도한 것이며,

게가 표현됨은 바다가 멀지 않다는 지역적 특수성이 구현된 것이다. 유곽은 4개소에 배치되었는데,

내부에는 9개의 유두가 배치되어 범종의 그것과 양식상 같음을 알 수 있다.

상대는 탑신부의 상단부에 2줄의 돌출된 선으로 구성했는데,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단엽 20판의 복련이 중첩 시문되었다. 이처럼 탑신부는 완전히 범종의 양식을 구현하고 있는데,

하대와 유곽의 간지에는 모두 4마리의 용을 조각했다. 전면에는 위패형의 액 내에 '소요당(逍遙堂)'이라 음각되어 있어

 소요대사의 부도임을 밝히고 있다. 위패형의 하단에는 상·하 5판의 앙복련이 양각되었다.

상륜을 구성하는 용뉴는 4마리의 용두(龍頭)가 석종을 움켜 물은 상태인데, 간지에는 운문이 조각되었고,

정상에는 보주가 마련되었다.


소요대사의 부도는 백양사 외에도 그가 입적한 담양 용추사와 연곡사에도 있다.

이중 연곡사서부도는 탑신부 1면에 '소요대사지탑 순치육년경인(逍遙大師之塔 順治六年庚寅)'이라

음각된 명문으로 보아 1650년(조선 효종 17)에 건립되었음이 분명하다. 따

라서 소요대사의 입적이 1649년인 점을 보아 사후 1년 만에 부도가 건립되면서,

3개의 사찰에 분사리(分舍利)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양사의 부도 역시 연곡사서부도의 건립연대를 보아

1650년을 건립의 하한(下限)으로 설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석조부도 중 석종형부도는 9세기 말에 조성된 태화사지12지상부도에서 처음 조성된 이래

고려 및 조선시대를 거치며 가장 많이 건립된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부도의 명칭은 전체적인 모습이 범종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어 붙여진 것이었지,

내용면에 있어서는 범종의 세부 양식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백양사부도는 전체적인 모습에서 뿐만 아니라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범종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이 같은 양식을 보이는 석종형부도로는 이것이 유일한 예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따라서 이 부도가 조사됨으로써

우리나라 석종형부도의 양식이 전통적인 범종에 근원을 두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부도의 주인공인 소요대사의 불교사적 위상과 더불어 건립연대가 확실해 역사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만암대종사 부도

 

환응스님에 이어 근대 백양사의 제2대 주지로 부임했던 만암 종헌스님은
백양사 전체 역사를 통해 가장 돋보이는 불사를 일구어 냈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한국 근대 불교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공사로 인해 철거되어 연못에 빠진 쌍계루와 백학봉 

  

극락교 



만암대종사고불총림도장 

 

총림(叢林)이란?

지금의 선원(禪院), 선림(禪林), 승당(僧堂), 전문도량(專門道場) 등 다수의 승려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곳을 총칭하여

총림(叢林)이라 함.

그리고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로 우리나라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5대 총림이 있으며,

고불총림 백양사는 1996년 3월 총림으로 공식 승격.



 

 

 

 

 

범종루 



 

설선당 



 



 

 

  

 

칠성각- 진영각- 극락보전- 명부전 



우화루 




고불선원



진신사리탑 



 


 

약사암 



약사암에서 바라 본 백양사와 부도전




영천굴

 

영천굴은 20평 남짓한 천연석굴로 영험하다는 영천이라는 샘이 있으며,

영천굴의 유래로는 옛날에 영천은 수도하는 이가 살았는데 항상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손님이 와서 공양을 대접하기 위해 쌀이 더 많이 나오라고 작대기로 쑤셨더니

그 뒤로는 쌀이 나오지 않고 물이 나왔다고한다

현재는 석조 관세음 보살상을 모시고

기도법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수도하는 별채도 3칸 지어 기도객이 끊이질 않고 있다.  

영천 샘 




 

 

 



 


 

날이 어두워진다.

여름날 같으면 아직 해가 있을 터인데 산속의 저녁은 유별나게 빨리도 찾아온다.

산행을 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약사암까지라도 발품을 팔아 다녀왔고 또 그곳에서 내려보는

백양사의 전경은 또한 일품이었다.

 

배도 고프고 동동주 생각도 나고

백양사 일주문을 벗어나니 18:00

정읍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18:45 백양사 역 사거리 터미널에서 20:00 출발하는 정읍행 버스가 20:15분에 도착

어둠을 뚫고 버스는 사정없이 정읍으로 달리고 있었다.

 

곳감



 

 

  

백양사 소개

 

백양사는 1400여년전 백제시대의 고찰로 유구한 역사와 주변의 빼어난 경관으로 이름이 높으며

또한 산내 10여개 암자 중 유서 깊은 운문암은 고려시대 때부터 납자들의 정진도량으로 유명한 곳이다.

다만 우리나라 대부분 사찰들이 그러하듯 백양사 역시 창건과 연혁을 전하는 자료가 충분하게 전하지 않는데다

정토사(淨土寺)· 백암사(白巖寺)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존재했던 사찰이기 때문에

그 역사에 관한 서술은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백양사가 언제 창건되었으며, 그 창건주가 누구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다음의 자료를 검토해 본다.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이 고려말 1337년(우왕 3)에 지었다는
'백암산정토사교루기(白巖山淨土寺橋樓記)'의 일부 내용을 보면, 오직 이 산은 장성군 북쪽 30리에 있는데
그 이름을 백암(白巖)이라 하였으며 암석이 모두 흰 색깔이라서 그렇게 이름 하였다한다.
석벽은 깎아지른 듯 험하고 산봉우리는 중첩하여 맑고 기이하며 웅장한 모습이 실로 이 지역의 명승지가 될 만하므로
신라 때의 어떤 이승(異僧)이 처음으로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백암사(白巖寺)로 하였다.

중국 송나라 경평 연간(423~424)에 이르러 정토선원(淨土禪院)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그 문도인 중연선사가 이를 이어 전당과 문무, 방장실, 요사 등 80여 칸을 다시 지었다.
중연선사의 문도가 차례로 전해 오다가 일린(一麟)스님이 그 사찰을 주관하여 처음의 법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 실린 '백암산정토산교루기'는
백양사의 창건 내용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며 여기서 백양사 창건과 관련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창건은 신라 때 이루어졌고 창건주는 법명은 알 수 없지만, '이승'이라고 표현된 점으로 보아
상당한 이적행(異蹟行)을 해온 승려일 것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백양사의 창건 때 이름은 '백암사'였으며,
창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토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또한 창건 이후
중연선사와 일린스님에 의해 백양사의 법맥이 계속 이어져 왔음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정도전이 지은 이 자료의 모든 내용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할 것인가는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특히 백암사에서 정토선원으로 사찰명이 바뀌는 시기가
중국 남송시대인 5세기 초반이라고 서술한 부분은 시기적으로 검토해야 할 대상이다.

이 시기는 신라의 불교 공인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이며,
더욱이 그 같은 상태에서 신라 스님이 백제 영토에 들어와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양사의 창건주가 신라 스님이었다는 점 그리고 백암사와 정토선원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임에 분명하다. 극렬한 배불론자였던 정도전의 '백암산정토사교루기'가
백양사 창건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또 이 기록은 이후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오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내용이 좀 더 구체화된다.

일반적으로 통하는 백양사의 유래는 백양사는 백제 무왕때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명찰로 본래 이름은 백암사였고,
1034년 중연선사가 크게 보수한 뒤 정토사로 불려졌다.
조선 선조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하여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한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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