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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조정래 太白山脈 문학관

조정래 太白山脈 문학관

 

 

언제 : 2008. 12.13~14 (1박2일)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학창시절 방학때 열 몇시간씩 걸려 기차 타고

 고향에 내려갈 때 혹은 서울에 올라 올 때에 아직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기억 중 하나는

밤 12시가 넘은 대전역에서 뜨겁고 시원한 가락국수를 고추가루 살짝 뿌리고 단무지와 함께 먹던 기억이

기분좋게 남아있는 일이다.


 

장모님 팔순 생신 모임을 12월 13일 오후5시 전라남도 순천에서 갖기로 해

오랫만에 아내와 함께 처가댁을 내려가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내와 시원하고 맛있는 가락국수를 먹었다.

 

 

 

 

 

 

중화요리집에서 장모님 팔순 생신을 축하 해 드리는 사진.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결혼생활 60년을 지나셨으며 장모님께 장인어른의 멋진 사랑 표현.

 

 

 

 

그날 밤

당분간 술을 마시지 않으려는 나는 술 폭탄에 맞아 다음 날 오전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오를 지나 겨우 몸을 추스려

2008.11.21 개관한 벌교에 있는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을 찾아 보았다. 

 

 

 부용산과 벌교읍내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은 벌교 버스터미널 뒤 제석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전경

 

  

2008년 11월 21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태백산맥 문학관이 개관했다.

분단문학의 최대 문제작으로 손꼽히는 조정래 작가가 1983년 현대문학에 연재해 6년 만에 완간한 대하소설.

태백산맥 문학관은

소설의 첫 장면 정화섭이 무당 소화를 만나기 위해 길을 가던 그 지점, 제석산 끝자락에 세워졌다.

보성군은 태백산맥 문학관을 시작으로 소설 속 현 부자집과 소화의 집, 주릿재와 철다리,

중도 방죽과 테마 공원으로 이어지는 문학 벨트를 건립할 계획이다.

 

◇ 국내 최대 작품 전시관

태백산맥 문학관은 소설의 주요 무대인 전남 보성군 벌교읍의 4,359.6m 대지에 지상 2층으로 건립됐다.

작가의 육필원고와 증여 작품 등 총 144건, 623점의 전시물품을 보관한 국내 최대 규모의 작품 전시관이다.

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북향으로 지어진 건물은 대지보다 깊이 10m 아래에 터를 잡고 건물을 지어 올렸다.

 

문학관을 만든 건축가 김 원은 “조정래 선생에게 설계 제의를 받은 것이 2004년 11월 중순이었다.

소설이 그려낸 분단의 아픔은 산의 등 줄기를 잘라내는 아픔과 비견될 것이다.

이 건물은 우리의 아픈 이야기가 묻힌 땅 속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등줄기가 잘라지는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건물 외벽에는 이종상 화백이 제작한 길이 81m, 높이 8m의 대규모 벽화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이 들어섰다.

국내 최대 규모의 이 자연석 벽화는 오방색 돌을 활용해 백두대간과 지리산, 독도 등 우리 국토를 형상화했다.

오방색 돌 가운데 몇 점은 이종삼 화백이 지리산에서 직접 가져와 심은 것이다.

 

제 1전시실에는

소설 의 탄생 과정과 소설 출간 이후 상황을 상세히 살펴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제 2전시실에는

작가의 방, 문학사랑방 등이 마련돼 작가정신을 살펴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특히 1전시실에는 태백산맥 취재 자료가 눈에 띄는데

작가가 직접 그린 벌교읍내 약도와 지리산 약도, 꼼꼼하게 적은 취재 수첩과 메모가 전시되어 있다.

 

80년대 대표적인 한국의 정치경제학자였던 박현채 선생과 함께 지리산에서 찍은 사진과

박 선생이 알려준 빨치산 노래를 적은 원고, 토벌대의 빨치산 분포도도 공개했다.

 

태백산맥 집필 당시에 썼던 만년필과 파이프 담배, 찻잔과 함께 높게 쌓아 올린 육필 원고는

창작의 고통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밖에 ‘참패한 혁명의 현실적 대가는 곧 죽음이다. 소설은 산하에 널린 무수한 죽음 위에서 끝났다’로

시작되는, 당시 한국일보 김훈 기자가 쓴 탈고 관련 기사와 10권의 책을 쓰게 만든 단 2장의 작가 구성노트,

집필과정 누계표, 그리고 우익단체의 협박에 괴로운 심경을 토로한 2통의 유서도 볼 수 있다.

 

소설 은 여순사건이 있었던 1948년 늦가을 벌교 포구를 배경으로

제석산 자락에 자리 잡은 현부자네 제각 부근에서 시작해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가던 1953년 늦은 가을까지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픈 과거를 반추한 작품이다.

1983년 에 제 1부가, 1986년부터 88년까지 2,3부가 에 연재되어 원고지 1만6,500매로 완성됐다.

 

1989년 전10권으로 완간돼 현재까지 약 7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 각계 문화 인사 300명 찾아

이날 문학관 개관식에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비롯해

정종해 보성군수, 문학평론가 황광수, 소리꾼 장사익 씨 등 문화인사 300 여명과 후배 문인,

전라도민 등 1,000 여명이 찾아와 성황을 이루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조정래 작가와 전시실을 구경해 눈길을 모았다.

박 명예회장은 “60년 전 벌교는 혼란과 비극의 땅이었다”면서 “바로 그런 벌교에서 소설 태백산맥이 태어나

과거의 고통을 현재와 미래의 교훈으로 깨닫게 하는 기념관으로 탄생했다.

오래 친교를 해온 이로서 기쁘다”고 축사했다.

 

황광수 문학평론가는

 “문학관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보다 문학관이 세워질 만큼 기념비적인 작품을 썼다는 게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지방 자치단체에서 이 문학콘텐츠가 도움이 됐을 만큼 대중적이면서 중요한 작품이 우리시대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이 문학관의 의미인 듯하다”고 밝혔다.

 

황 평론가는 1989년 태백산맥이 한길사에서 출간됐을 당시

이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20년 이상 조정래 작가와 인연을 맺고 있는 각별한 사이. 등

조정래 작가의 작품을 분석한 단행본을 냈을 정도로

조정래 작가와 문학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평론가이기도 하다.

 

소설 집필 당시 러시아 취재에 동행한 적이 있는 그는

“집념과 근성이 놀라운 작가다.

조정래 작가는 소설이 쓰여 지지 않을 때 책상 앞에 더 바짝 다가가는 사람”이라고 설명했고,

 프랑스어 번역을 담당한 재불학자 변정원-조르주 지젤마이어 부부는

“태백산맥 문학관이 건립된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한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도 그렇게 희생자가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문학관은

물론 이 희생된 사람을 위해 위로비를 세워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감회를 밝혔다.

 

조정래 작가의 부인, 김초혜 시인은 기자들의 질문에

 “조 선생의 문학관이라 나의 감회는 없다”고 입을 다물었지만,

계속된 질문에 집필과정과 이후 이적성 논란 때의 마음 고생을 털어 놓았다.

 

“제가 뭘 한건 없어요. 워낙 꼼꼼하고 자기 일을 알아서 하시는 분이니까.

 빨리 쓰다 보면 글의 의미를 다 안 쓸 때도 있고 동사를 안 쓸 때도 있는데 그때는 내가 써주죠.

지금 지나고 나니까 괜찮지만,

공갈 협박에 시달리다가 유서 썼을 때는 내가 되게 무서워했어.

협박에 내내 시달리다가 ‘여보, 전화내용 녹음해요’라고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그때부터 안 오더라고.”

 

후배 문인들도 먼발치에서 문학관 탄생을 축하했다.

 이문재 시인은 “태백산맥 문학관은 지자체가 앞장서 만들었고 규모도 크다.

테마파크 형식으로 만들 것이라고 하는데 지자체와 독자 모두 도움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 시사주간지 기자 시절 조정래 작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이기호 소설가는 “89년 10권 완간 됐을 때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수업시간에 그 책을 읽었는데, 보통 태백산맥은 ‘불온서적’본다고 혼났었다.

그런데 나는 하필 소화가 나오는 은밀한 장면을 읽다 들켜서 선생님께 ‘음란서적’보는 놈으로 찍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문학관 설립에 대한 욕심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제가 강원도 출신인데, 그곳에는 박경리라는 너무나 큰 거목이 있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 문학 공간의 장점을 살렸으면

태백산맥 문학관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93년 보성군이 태백산맥 문학관을 관광벨트화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조정래 작가가 이듬해 국가보안법상 이적 표현물 제작 발표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한때 문학관 건립이 무산 위기를 맞기도 했다.

 

11년 만에 국가보안법 위반이 무혐의 처분을 받아

2005년부터 다시 태백산맥 문학관과 공원 조성 사업이 진행됐다.

2003년 김제에 설립된 아리랑 문학관보다 건립이 늦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작가 생전의 문학관인 만큼 이 곳의 자료와 볼거리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문학관을 살펴 본 전문가들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광운대 고명철 교수는 “문학관이 단순하게 창작했던 사람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창작자의 정신이 문학관을 찾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태백산맥 문학관은

벌교란 지역을 공간으로 했기 때문에 문학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 듯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실천문학 오창은 편집위원은

“문학적 공간을 위주로 보여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소설 태백산맥은 하나의 역사이니까, 역사 사진을 묶어서 실제와 소설의 차이를 보여준다든지,

당시 사건 현장을 발굴해서 함께 보여준다면, 더 알찬 구성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지아 소설가는

 “소설 무대인 벌교를 100분의 1 또는 1000분의 1로 축소시킨 태백산맥 모형도를 전시실에 설치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직접 철다리와 중도방죽 등을 걸어다니면 훨씬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시대의 한이 서린 벌교가 문학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보성군청에서는 총 45억 원이 소요된 문학관을 비롯해 소설 의 현장을 보존, 복원해 문학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보성군은 태백산맥 문학공원 사업비로 85억 원을 책정했다고 밝혔다.

 

 

△ 

조정래 문학관에서 아내

 

 

 

 

 

 

 

 소설 태백산맥 원고지

 

 

 

 

 

 아내와 큰딸이 뭔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아주 아름답다.

 

 

 

 

 

 

 

          ▲ 태백산백  조정래 작가가 21일 오후 전남 보성 벌교에서 자신의 문학을 위해  만들어진

          '태백산맥 문학관' 개관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조정래 문학의 절정 대하소설 태백산

           맥은 민족분단의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한국문학사에 우뚝 선

           인물로 평가 받는다. 

 

 

현부자 집

중도 들녘이 질펀하게 내려다 보이는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세워진 이 집과 제각은 본래 박씨문중의 소유이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는 집이며 소화와 정하섭의 애틋한 사랑의 보금자리이다.

 

 

 

 

 

 

 

 

 

 문학관 4층 전망대에서 본

현 부자집과 소화의 집(사진 맨 처음  조그만 기와집 한 채) 

 

 

중도 방죽

일본인 나카시마(중도)의 이름을 따 붙여진 간척지 방죽의 이름. 

 

철다리

1930년 경전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놓인 이 철다리는 소설에서 염상구와 장터거리 주먹패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땅벌이라는 깡패 왕초의 제의에 철교 가운데 서서 기차가 오면 누가 더 오래 피하지 않나

담력을 겨루던 현장이다. 

 

 

 멀리 소화다리(부용교).

1931년 6월 소화 6년에 건립된 다리라 부용교이름 대신 소화다리라 불리운다. 이 다리는 여순사건과

6.25의 대 격랑에서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남해에서 여자만을 지나 중도뚝을 따라 소화다리(부용교)와 홍교다리 위 까지 바닷물이 올라온다.

 

 

 

 △

오금재에서 바라 본

낙안 민속마을과 벌교 너른 들(좌 높은 산이 제석산, 정면 희미하고 뾰쪽한 고흥 첨산이 보인다.)

 

 

 

귀가길에 동짓달 열이레 달이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소설속의 벌교는......

지리적으로 보성군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결되는 포구이며, 고흥반도와 순천.보성을 잇는

삼거리의 교통의 요충지였다.

 

철다리 아래 선착장은 밀물을 타고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실거렸고,

 상주하는 일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 단위보다 많았던 왜색 짙은 곳이며 상업의 발달로 돈이 모이고

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자연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 났던 곳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벌교에 가서  주먹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태백산맥 1권 1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