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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충남) 추사 김정희 고택

추사 김정희 고택

 

언제: 2009.10.22.목요일

누구: 3명

어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 고택

 

가을이 깊어가는 날

추사 김정희 고택을 둘러보기로 하고 지인 2명과 함께 승용차로 08:50 부평역을 출발했다.

서해대교의 행담도 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씩 마시고

황금들판을 달려 예산으로 향했으나 초행길이다 보니 길을 잘못 들기도 했으나

용케 추사 고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추사의 고택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용산(일명 소봉래)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추사 고택입구의 새한도를 그린 기념물

 

 

솟을 대문 

사랑채와 모란앞의 돌기둥 石年 

 

돌기둥 石年(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측정했다함) 

사랑채 온돌방 아궁이 

사랑채 뒷편의 풍경  

사랑채 온돌방 

 

 

 

 

 

 

국보 제180호 완당 세한도의 영인본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가로 69.2㎝, 세로 23㎝의 크기이다.
이 그림은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

 

 

안채와 입구 

 

 

안채 내부 

농선실과 부엌

 

 

추사의 사당 

 


사당 뒷편에는 오죽이 숲을 이루고 있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45호: 화순옹주 정려문(和順翁主 旌閭門)

정려문은 추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영조의 차녀)의 정절을 기리고자 정조가 명정(命旌)한 열녀문이다.

화순옹주는 부군 월성위 김한신(1720-1758)이 젊은 나이인 38세에 작고하자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뒤를 따랐다.

화순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

 

백송白松은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는 몇그루 없는 희귀수종이다.

이 백송은 추사선생이 25세때 자제군관(子弟軍官)자격으로 생부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청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다녀오면서 귀국시 가져온 씨를 고조부 김흥경(金興慶)의 묘 입구에 심었던 것으로 원래 밑에서부터 세가지로 갈린 수형이었는데 두 가지는 枯死하고 한 가지만 남아 있다.

수령은 약200년, 높이 약 10m.

 

 

 

우물터 

문화재자료 188호: 김정희묘 

 

 

추사 기념관 

 

 

 

 

 

 

추사의 유품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집은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용궁리 일대의 토지를 별양전으로 하사 받아 지은 살림집이다.
안채·사랑채·문간채 그리고 사당채로 구성된 이 집은 크기가 약 80평이며, 18세기 중엽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추사 이후 후손이 살며 선조의 유지를 받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매되었다. 그 후 1976년 예산군에서 지방문화재 제43호로 지정하여 매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이다. 어린 백송(白松)이 몇 그루 있는 솟을대문을 지나면 바로 사랑채가 나타난다.
이 백송은 추사가 청나라 연경에서 가져온 백송의 묘목으로, 본래의 백송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세월의 두께가 두껍게 내려앉은 뜰에는 큰 은행나무와 감나무 그리고 석류나무가 고택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고택의 구조를 살펴보면 6간의 안채와 2간통(間通)의 대청과 안방, 건넌방이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의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ㅁ`자형집이다. 안방과 건넌방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정은 다락으로 되어 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대청은 6칸으로 그리 흔하지 않는 규모이며, 이런 `ㅁ`자형 가옥은 중부 지방과 영남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이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안채와 엄격히 구분되어 있고, 남쪽에 1간, 동쪽에 2간의 온돌방을 두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이처럼 마루 공간이 커서 집 주인이 사회적, 예술적 활동을 하는 데 긴요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집은 현재 군(郡)에서 조선 사대부의 삶을 보여 주는 전시장으로 꾸며 놓았는데, 사랑채 안에는 안석과 궤 그리고 책상, 문갑들이 잘 정돈되어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하다. 또한 기둥에는 추사체를 집자한 온갖 주련이 걸려 있어 추사의 채취를 느끼게 한다.
사랑채 댓돌 앞마당에는 석년(石年)이라 새긴 돌기둥이 목단을 배경으로 서 있는데, 특히 `년(年)`자가 멋지다. 이 돌 기둥은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한다. 추사는 당시 일기 시작한 실학의 거두 박제가의 문하생이었고, 그 자신도 중국을 다녀 온 실학자이었으므로 실사구시의 학문을 펼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방에는 모조품이기는 하나 추사의 유묵이 걸려 있어 추사체를 엿볼 수 있으며 안채에 있는 `農祥室`은 지방문화재 44호로 지정되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1786년 6월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부친 노경씨와 모친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기예하여 일찍이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수제자가 되었다.

추사선생은 1809년 24세에 생원시에 합격, 그 해 부친을 따라 청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을 수행하였고

1819년 34세에 문과에 급제

충청우도 암행어사, 예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을 지내다 1840년 55세 당쟁에 몰려 9년간 제주도에 유배생활을 하고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1850년(철종 1년) 또는 1851년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북청 유배는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되며,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波) 노과(老果)등 200여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