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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강화도 전등사와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강화도 전등사와 정족산 사고(鼎足山 史庫)

 

언제 : 2009. 9. 17.

장소 : 강화도 전등사

 

조석으로 서늘해진 날씨는 완연한 가을이고, 낮의 햇빛은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기에 좋게 강렬하고 

지난여름은 태풍도 없어 올해는 오곡과 과일이 풍성할 것이다.

 

요즘

나 자신을 잃어버린 공허함을 달랠 겸 강화 전등사를 다녀왔다.

김포 들녘에는

노랗게 익어가는 벼와 밭에는 온갖 채소와 과일이 잘 익어가고 있었고

초지대교를 건너며 본 서해에는 어선들이 바빴다.

자연은

이렇게 하늘에 순응하며 평화롭게 가을을 수놓고 있었다. 

 

 

 

 

전등사 남문 쪽 솔 숲 

 

전등사 입구

삼랑성의 남문이다. 

 

삼랑성 남문을 지나자 나무 한 그루가 강하게 버티고 서

우리에게 삶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전등사 부도

수령 600년이 넘는 고목

 

전통찻집

다른 곳의 찻집보다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찻집 뜰의 인상적인 나무

 

 

구멍으로 바라본 풍경

 

 

대나무는 사철 푸르고 곧으며 속을 비워 어떤 시련에도 유연하게 대처한다.

 

꽃무릇

일명 상사화라고도 하는데 잎과 꽃의 개화시기가 달라 서로 만날 수 없다.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대조루에 걸린 전등사 현판

계단과 대조루 사이에 대웅전 불상이 인상적이다.

 

 


부처님께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1. 탐욕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건져 주시기를

2. 미워하는 마음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 넘치기를

3. 어려움에 처했을 때 현명한 판단과 건강을 주시기를.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사진2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보물 제1785호

이 목조삼불좌상은 17세기 전반에 전북, 충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수연(守衍)이 수화승으로 참여하여 1623년에 조성한 불상이다.

삼불의 구성은 석가불을 본존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좌우에 협시하는 형식으로서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삼세불의 도상을 보이고 있다.


불상들의 세부를 보면, 본존 석가불상은 단엄한 자세에 자비한 상호(相好)를 보이며,

좌우의 아미타불상과 약사 불상은 이목구비의 표현이나 비례 면에서 본존상 보다는 다소 조형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본존상은 상호의 표현이 근엄하고 전체적인 신체비례 면에서도 안정감이 느껴진다.


삼불좌상의 얼굴은 각각 독특한 상호를 보이고 옷주름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전등사 삼세불상 조성에 참여한 조각승들 가운데 수화승 수연과 함께

 서천 봉서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조성에 참여했던 성옥(性玉)의 조각적 개성이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조성원문을 통하여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각적으로 우수하며, 조각승들과 나타난 발원시주자들의 명단이 잘 전하여

불상(佛像), 면금(面金), 체목금, 체목, 오금(烏金), 좌대(座臺), 보단(甫團), 채안(彩安), 복장(腹藏) 등

세부적인 시주 항목이 기록된 점 등에서 조선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묘법연화경 목판 사진1         

전등사 묘법연화경 목판

보물 제1908호

전등사 법화경판은 조선 1544년(중종 39)에 제작된 것으로, 법화경은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읽혀진 부처님 말씀이다.

법화경의 성립연대는 대체로 기원 전후에 성립되었다고 하는 설이 일반적이며

산문(散文)과 시구(詩句)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살, 비구, 비구니, 신도들에게 성불을 예언하고,

그러기 위해 일불승을 삼승으로 나누어 설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법화경판은 현재 대웅보전 내 유리문 장내에 총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존하는 30여 점의 법화경판 가운데 조성시기가 분명하고

특히 임진왜란 이전 조성으로 밝혀진 것은 8점에 불과하므로 그 역사적·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대웅전 처마 4모서리에 조각된 벌거벗은 여인.

한쪽은 두 손을 올렸고

한쪽은 한 손을 내렸다.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대웅전 부처님께 절을 하고 나오니 청아한 풍경소리가 화답을 주었고

 

탁한 물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이

잘 왔다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처염상정(處染常淨): 더러운 곳에 머물지라도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

 

  

玉水로 마음을 씻어보고.

 

오죽(烏竹)의 귀태와 유연함을 부러워하였다.

 

 

대조루

 

대웅전 앞 뜰에 서 있는 고목과 벤치

연인들이 앉아 정겨운 얘기를 나누고 있어 더 아름답다.

 

 

         



전등사 약사전

보물 제179호

전등사 약사전은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이다.

전등사는 고구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1605년(선조 38)과 1614년(광해군 6)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1621년(광해군 13)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대웅보전 서쪽에 있는 아담한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조선 1876년(고종 13) 대웅보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실제로 약사전의 지붕을 덮고 있는 명문 기와에서 1644년(인조 22)에

기와를 중수하였다는 이른 시기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건

물의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건축 수법이 대웅보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 건물로 짐작하고 있다.


종각과 극락암 그리고 명부전


 강화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사진1  

전등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보물 제1786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은 조성원문을 통하여 1636년이라는 뚜렷한 조성년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조각승 수연(守衍)에 의해 조성된 지 13년이 지난 뒤에

역시 수연이 중심이 되어 제작한 상들이다.

지장보살상과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十王)과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의 권속이 많다보니 조각승도 12명이나 참여하여 수연의 지휘 아래 제작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상들의 조성을 위한 시주에 수많은 신도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당시 전등사 일대의 대대적인 불사(佛事)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장보살상은 방형의 얼굴에 엄중하면서도 자비로운 상호(相好)를 보이며 양 어깨에 걸쳐진 대의 옷자락은

유연한 주름을 이루며 하체로 연결된다. 양손으로는 지물을 들지 않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을 취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비례와 조형감이 우수하다.

지장보살상과 매우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도명존자상은

얼굴표현에서 사실성이 돋보이며, 장삼위에 가사를 입은 착의형식이 단정하다.

수연 조각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장보살상과 도명존자 외에도 시왕상과 기타 권속의 여러 상에서 보이는

인간적이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는 수연 조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각기법상의 우수성, 조각가와 조성년대에 대한 분명한 기록, 원

래부터 전등사 명부전 봉안을 위해 조성된 상이라는 여러 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크다.



전등사 범종은 특이하게 중국 송나라때 주조된 것이다.

 

 

전등사 경내

 


  

무엇을 위한 기원일까?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각.

 

전등사 소개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힌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46년 때인 1259년이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종 46년(1259년), 임금이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짓도록 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5년 뒤인 원종 5년(1264년),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 동안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불정오성도량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게 하는, 불교 행사를 일컫는다. 원종 임금이 진종사에서 이런 행사를 갖게 한 것은 당시 진종사의 사세(寺勢)가 크게 중흥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등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당시 정화궁주는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화궁주의 옥등 설화보다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대장경 때문에 전등사로 개칭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근거가 있다. 그 대장경 속에는 <경덕전등록> 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 대조루를 중건할 때의 모연문을 보면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전등사는 고려 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찰이었던 만큼 그 후에도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연이어 중수(重修)되었다.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
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 스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을 일컫는 말이다. 1726년에는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重修) 불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등사는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로 부각되었다.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부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
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
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 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하게 찾는 수도권 최고(最古)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힌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