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전등사의 삼랑성
언제: 2009.9.17.
장소: 강화 전등사
전등사를 둘러보고 나서 아무도 만나지 못한 산 속을 혼자 걸어서 삼랑성 한 바퀴를 돌아봤다.
가을은
이미 깊어가고 있음을 너른 들의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는 것과 억새가 바람에 하얀 머리칼을 날리며 고고한 자태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이름 모를 꽃들의 향연으로 하루를 가을 속에 충분히 젖어 볼 수 있어 좋았고,
안개가 끼어 조망은 좋지 않았으나 서해의 점점의 섬들과 김포와 강화를 잇는 초지대교와 멀리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도 희미하게 보여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정족산은 낮은 산이지만
아무도 만나지 않았던 산속을 혼자서 터벅터벅 걸으며 작금의 문제들을 생각할 수 있었고
산에서 바라보는
너른 들판과 시원한 바람 상쾌한 공기가 내 안의 냄새 나는 것들을 정화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전등사를 내려가는데 차도에 사마귀 한 마리가 나와 있어 차들이 다녀 위험하여
풀숲으로 가라고 만지니 사마귀가 어이없게도 나를 향해 공격형태를 취했다. 미물의 사마귀에게도
내가 어리숙하게 보였는 모양이다.
결국 사마귀는 내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돌아서 풀숲으로 돌아갔다.
강화 삼랑성은 사적 제130호. 둘레 약 1㎞.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인해 삼랑성이라고 한다.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삼랑성의 남문으로 전등사의 정문
삼랑성 서문
서문의 성곽
정족산 정상
정상에서 바라 본 서문에서 남문사이의 성곽
마니산
멀리 김포와 강화간의 서해가 조망되고 앞의 마을은 강화군 길상면
억새의 하얀 털이 인상적이다.
북문
북문 좌우의 성곽
가을 내음
반듯하게 정리된 논과 수로 그리고 누렇게 익어가는 벼
산메뚜기가 풀속에 숨어 있다.
내 큰 누님같은 싸리꽃
정족산에서 내려다 본 길상면 가운데 붉은 건물이 성공회성당
얕은 산너머 가연저수지
동문의 성곽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
삼랑성 동문
삼랑성 동문밖 식당의 이색적인 풍경
삼랑성 소개
고려사(高麗史)의 지리지에 의하면 전등산(傳燈山)을 삼랑성(三郞城)이라고 부르며, 단군(檀君)이 세 아들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을 시켜서 쌓았다고 전해 온다.
산의 이름은 길상산(吉祥山)이라고 하며 성의 이름은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기록되기도 하였으나, 항상 이 지역에서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구전(口傳)이 이어져 왔다.
성곽의 축조는 거친 할석(割石)으로 되어 있으며, 성의 안쪽 벽면도 할석으로 채워 안팎을 겹축(夾築)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 돌을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석축 이전에는 토축된 것이었다고 여겨지며, 해발 222.3m인 산의 정상에서 동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향한 계곡에 수구과 남문이 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부(鞍部)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2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다.
성벽이 회절(回折)하는 곳마다 10여개의 곡성을 이루며,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성벽은 서측의 산정에서 북벽을 이루는 두 개의 봉우리와 동쪽 봉우리 및 서문 남동쪽의 봉우리 등이 있어서 마치 솥과 같은 고로봉형(고로峰形)을 이루었다.
조선왕조의 말기까지 존속하여 여장(女墻)과 총안(銃眼 )·사혈(射穴)이 남은 곳도 있다.
1259년(고려(高麗)고종(高宗)46)5월에 중랑장(中郞將)백승현(白勝賢)의 풍수설에 따라 이 성내에다 가궐(假闕)을 지었다.
1606년(선조(宣祖)39)마니산(摩尼山)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여 실록(實錄)을 보존해 오다가 1660년(현종(顯宗)1)삼랑성내의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로 옮겼다.
이때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譜閣)이 같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모두 없어지고 전등사(傳燈寺)만 남아 있다.
이 산성은 고려(高麗)때에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739년(영조(英祖)15)중수를 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하였고, 1764년 다시 성을 중수하였다.
성안에는 훈련도감과 금위영·어영청 소속의 창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산성은 1866(고종(高宗)3)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하려던 160명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첩지로 유명하다.
현재 성내에는 당시 프랑스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순무천총(巡撫千摠)양헌수(梁憲洙)의 승전비가 있고,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하고 문루를 세워서 예전대로 종해루라는 현판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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