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릉과 신륵사 여행
후덥지근한 날이었다. 집에 있으면 컨디션만 나빠질 것 같아 훌훌 잡념을 털고 숲길을 걸을양으로
남한강이 흐르는 여주로 발길을 향했다.
이런 날은 숲길을 걸으면 무더위도 걱정없고 정신도 맑아지니 오랫만에 영릉을 둘러보며
좋은 생각을 챙기기 위함이었다.
인천에서 강릉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약 1시간 30분만에 여주에 도착
세종대왕과 효종대왕릉을 찾아갔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월요일이라 휴관이네!!!
시원한 숲길을 걸으며 하루를 보낼 양이었는데
아쉬움을 남기고 남한강이 흐르는 신륵사로 향했다.
숲길이 아니면 시원한 강을 바라보는 풍광은 또 어떤가!
신륵사를 찾아가는 길에 여주 세계 생활도자기전이 열린 공간이 있어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신륵사 찾아가는 길
여주시내에서 남한강을 건너자마자 우측의 길을 따라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륵사가 금방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깊숙한 산속에 있는데,
신륵사는 푸른 남한강 상류인 여강(驪江)의 물이 감싸안은 나즈막한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드넓은 모래벌 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어 풍광이 뛰어난 고찰이다.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조사당앞 약 600년 향나무(높이 5m 나무둘레 1.3m)
부도
신륵사 전경
수령 약 600년 된 은행나무(높이 22m 둘레 3.1m)
강월헌(江月軒)과 3층석탑
절 앞 강가 절벽에 세워놓은 강월헌과 무명석탑이 신륵사 관광에 마침표를 찍는다. ‘달을 낚는 정자’라고도 불리는 강월헌에 오르면 남한강의 물굽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남한강의 풍경
강월헌(江月軒)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이다. 1379년(우왕 5)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조사당(祖師堂:보물 제180호)·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爐殿)·칠성각·종각·구룡루(九龍樓)·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다층석탑(보물 제225호)·다층전탑(보물 제226호)·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석등(보물 제231호)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
신륵사 관광단지의 꽃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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