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최고의 여행지
신의 걸작품 요정의 바위 카파도키아 지역
카파도키아 명칭[Cappadocia] 아나톨리아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 지명.
"Cappadocia"라는 말은 페르시아어의 “Kapatuka”에서 나온 말이며, "좋은 말의 고장"(Country of thoroughbred horses) 이라는 뜻이다. 토로스 산맥 북쪽의 고원에 있었던 카파도키아는 로마의 동맹국이자 속국이며 나중에는 로마의 속주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카파도키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BC 6세기의 문헌이다.
그 당시 카파도키아에서는 봉건세력이 페르시아 사트라프(총독)의 지배를 받았고, 조로아스터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 지역은 로마에 점령당할 때까지 페르시아의 성격을 유지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카파도키아를 우회했지만, 페르디카스 장군이 이끄는 부대를 이 지역으로 파견했다(BC 322).
페르디카스 [Perdiccas] BC 365,~BC 321 경 마케도니아의 장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에 있다가 그가 죽은(BC 323) 뒤 섭정이 되었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벌인 군사작전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대왕이 죽자 귀족들의 선두에 서 대왕의 왕비인 록사네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기가 제국을 계승할 것을 지지했다. 섭정 권력의 분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자 페르디카스는 '최고 장군'으로서 막대한 권한을 행사했으며 곧 왕이 될 듯이 행세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그의 행동에 대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프리지아의 안티고노스1세와 같은 지방총독들과 섭정에 참여하고 있던 크라테로스 및 안티파트로스가 반발하기 시작했다. BC 322년 페르디카스는 카파도키아를 정복하고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유능한 심복인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를 총독에 앉혔다. 안티고노스1세는 유럽으로 몸을 피해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에게 페르디카스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설득했다. 페르디카스는 에우메네스로 하여금 소아시아에서 크라테로스와 안티고노스1세를 막도록 하고 프톨레마이오스가 있는 이집트로 쳐들어갔으나 나일 강을 건너는 데 실패한 뒤 역모를 꾸민 휘하 장교에게 암살당했다)
BC 190년에 로마가 마그네시아에서 승리를 거둘 때까지 셀레우코스 왕조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가 승리한 뒤 이 지역은 BC 1세기에 폰투스 왕국과 아르메니아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로마에 충성을 바쳤다. 17년에 티베리우스가 이 지역을 병합할 때까지 로마의 속국으로 남아 있었던 카파도키아는 토로스 산맥의 전략적 통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11세기까지 동로마 제국의 보루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파도키아 전체지역
토로스 산맥 [Toros (영)Taurus Mountains.] 터키 남부의 산맥. 지중해 연안과 평행을 이루며, 서쪽 에그리디르 호에서 동쪽의 유프라테스 강 상류유역까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다. 토로스 산맥의 본맥(本脈)에 있는 해발 3,333m의 알라(ALA)산과 누르 산맥의 외딴 지맥에 속한 에르지예스 산이 이 산계의 최고봉을 이루며, 그 밖의 봉우리들도 대부분 3,000~3,700m로 솟아 있다. 해발 2,500m의 경사면까지는 소나무·삼나무·참나무·향나무 숲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흰 석회석 산등성이가 많이 보인다. 산맥 서부의 평균해발고도 1,000m인 지점에는 호수들로 둘러싸인 분지가 많다. 아다나 아래쪽에 있는 실리시아 평원의 토양층이 두꺼운 비옥지대를 제외하면 남쪽의 해안평야지대는 좁은 편이어서 전 지역에 걸쳐 인구밀도가 희박하며, 산맥으로 인해 내륙지방과 단절되어 있다. 토로스 산맥을 가로지르는 길 중에서 예로부터 대상로 및 군용도로로 이용되었던 퀼레크보아지(실리시아 관문)가 가장 유명하다. 그밖에 이 산맥의 본맥을 가로질러 카이세리와 아다나를 연결하는 철도가 근처를 지난다. 광물자원으로는 은·구리·갈탄·아연·철·비소 등이 있으며, 그 가운데 일부가 개발되고 있다.)
위치히사르 코스모스와 조화를 이룬다
특히 비잔틴 시대에는 당시의 성직자들의 은둔생활 풍조에 따라 많은 암굴 수도원이 건설되었으며, 바실리우스 [Basilius the Great, Saint], 그레고리우스의 영향으로 기독교 정통교리와 신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2세기부터 시작된 동부로부터의 터키인들의 이주로 소아시아 반도는 이제 이슬람화된 터키인들의 영향권 아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건설한 셀죽제국(1304년)이나 오스만 제국(1453년)은 소아시아 반도내의 기독교 사회에 비교적 우호적인 편이었다. 이렇게 카파도키아의 기독교 사회는 20세기 초까지그들의 신앙을 비교적 자유롭게 누려 나갈 수 있었다.
그 후 터키공화국(1923년)과 그리스 간의 소수민족 교환 협정에 따라(1920년) 이 지역에 거주하던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로 이주해 감으로써 오늘날은 그들이 남겨놓은 문화적 흔적만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괴뢰메 야외 박물관
괴뢰메를 중심으로 한 인근지역은 역사시대의 초기부터 인간들이 거주해 왔지만, 이곳의 천연적인 지형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다. 이곳에는 1년 365일에 해당하는 365개의 암굴 교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약 30개의 암굴 교회 만이 야외 박물관(Open Air Museum)으로 개장되어 공개되고 있다.
이 암굴교회들은 입구와 몇 개의 통풍 및 채광을 위한 구멍만이 뚫려있어서 밖에서 보면 거의 인간이 거주한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외부의 황량한 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거의 프레스코 벽화로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다.
그러나 이 벽화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약간 서툴고 조잡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대부분의 교회가 벽화 내용이나 미술양식에 있어서도 획일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비잔틴 제국의 726-843년 사이에 있었던 성상파괴주의 영향으로 벽화 예술이 상당히 퇴보되었기 때문이다. 성상파괴주의가 남긴 또 하나의 특징은 금지된 인물 대신에 상징적인 무늬나 과일 및 동물의 무늬를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이들 중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 사슴, 공작, 비둘기 등의 무늬가 벽화의 주요소재가 되었다.
지하도시 지역
이 곳의 도시들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지 않다.
지금까지 발견된 도시는 36개로서 서로 연결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지상에서는 알아 볼 수 없는 거대한 지하 도시를 건설했다. 길이 85m나 되는 우물과 서로 다른 높이의 수평으로 땅굴을 파고 이 층들을 지상과 연결하기 위해 복잡한 터널과 계단들을 만들어 놓았다.
가장 크고 잘 보존이 된 지하도시는 카이마클르와 데린쿠유로서 네브쉐히르에서 남쪽을 약 29Km와 30Km 떨어진 지점에 각각 위치하고 있는 지하도시이다.
지금 여행자에게 카이마클르는 지하 4층까지 데린쿠유는 지하 8층(85m)까지 내려가 볼 수 있다.
기원전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지하로 굴을 파고 거주했으리라 믿어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인구가 늘어나면서 거주민들은 더 넓은 주거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되자 옆으로 혹은 지하로 더 많은 시설들을 만들어 가기 시작해 결국 오늘날엔 하나의 거대한 지하 도시가 존재하게 되었다. 지하도시의 구조를 살펴보면 각 시설물들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입구는 단지 하나의 작은 우물같이 되어있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은 공간이 존재하고 있음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데린쿠유의 경우 깊이 55m 면적이 2500sqm나 되는데 지하도시의 사람들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침실을 따로 만들지 않고 거실 벽에 선반 모양의 굴을 파서 소위 '상자침대'에서 잠을 잤다. 여러 방들 중 어떤 곳은 기도실로 만들어져 그 곳에 제단과 십자가를 설치하기도 했다. 벽이나 천장이 까맣게 그을려져 있는 방은 물론 부엌이나 식당으로 사용된 곳이고 그 바닥이 움푹 파인 곳은 토기를 세워 놓았던 곳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특이한 시설물은 둥근 맷돌의 돌문이다. 이것은 외적의 침입 시 외부로부터 각 층을 쉽게 차단하기 위해 각층에 연결되는 터널의 입구마다 설치되었다. 이 돌문의 가운데에는 지렛대를 꽂을 수 있는 구멍이 파져 있어 쉽게 열고 닫을 수 있지만 외부에서는 이 돌의 무게 때문에 문을 열기가 불가능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삶을 느낄 수 있다.
지하도시 내부
위치 히사르 지역
60미터 높은 성채로 마치 왕관 모양을 하고 있고 창문이 군데군데 박힌 고층 빌딩처럼 산 꼭대기에 서 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살수 있는 방, 부엌 그리고 교회 등이 있다.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이어서 방어하기 쉬운 이곳은 그 내부의 땅속 수백 미터까지 우물을 파고 지하수를 떠 올릴 수 있어 더욱 요긴한 요새가 되었다.
오르타 히사르 지역
일명 '가운데 요새'라고 불리는 이 마을에 들어서면 산기슭에 지어 놓은 이 마을 특유의 하얀 집들을 구경할 수 있다. 암굴과 현대식 벽돌을 조화시켜서 만든 이 건물은 주로 과일이나 야채를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된다.
우리나라 돈으로 800원정도 기념품
윌귑 지역
가파른 바위 산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들은 그 곳에 그들의 집들로 가득 채우기에 충분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 했던 집들은 후에 모두 붕괴되었고, 지금 남아있는 것들은 물건 따위를 두는 오두막이나 가축의 우리 등으로 상용되고 있다. A.D10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위르귑은 중세기의 성직자들의 거주지였다고 한다. 위르귑과 오르타하사르의 길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바위 피라미드가 어색한 모자를 쓴 것 같고, 혹은 함께 그룹지어 있는 것 같다.
젤베 지역
젤베는 가장 많은 사람이 거주했던 종합도시로서 거주 처는 물론이고 교회, 방앗간, 물 저장탱크 등 모든 시설을 다 갖추고 있다. 젤베 계곡에는 비록 상당히 붕괴되어 형제를 분간하기 어렵지만 2개의 교회를 만날 수 있다. 교회의 벽화 내용에 따라서 '포도가 있는 교회' '사슴이 있는 교회'가 그것이다. 이들 교회는 성상파괴주의 기간 중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벽화에는 인물상 대신 포도, 사슴, 물고기 등의 상징적인 무늬가 있다.
방송 촬영중 도자기 만드는 모습
아바노스 지역
아바노스 마을은 터키에서 가장 긴 강인 크즐을막(붉은강:1,182Km)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바노스'는 강변에 철분을 함유한 황토색의 점토를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도자기, 카펫, 포도주 산지로 유명하다.
아바노스 도자기 상점
으흘라라 계곡 지역
고대 병원이 있었으나 초기 기독교인들의 도피처가 되면서 바위를 깎아 만든 많은 교회가 생겼고 신약성경과 지역 종교지도자들과 순교자들의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다.
수도원 골짜기 지역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3개의 갓이 있는 바위를 파고 생활한 시몬의 벽화를 그려 넣었기에 시몬의 수도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벽화의 내용은 시몬과 그의 어머니, 용을 치료하고 있는 시몬 등이다.
성 시몬 (St. Symeon the stylite 390-459)은 주두 고행 생활의 창시자이다. 로마의 박해시절부터 자기희생과 헌신, 순교로만 이어지던 기독교인들에게 갑작스런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과 신앙의 자유는 일시적인 당황을 갖게 했다. 자기 희생에 익숙해 있던 이들은 이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의 고행 및 은둔생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시몬으로 그는 안디옥(현 안탁키야)지방에서 살았다. 스스로의 고행을 위해 좁은 굴속이나 속이 빈 우물 속이나 바위의 쇠사슬 묶어 만족하지 못하고 방랑생활을 하며, 수평적 탈출이 어려워지자 이번에는 수직적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3단의 기둥을 쌓고, 그 꼭대기에 겨우 자신만이 설 수 있는 공간 속에서 생활했다. 왕이 조언을 구하기 위하여 찾아오면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야 했으며, 그는 죽을 때까지 이 기둥꼭대기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거나 조언하며 살았다고 한다. 마치 갓을 쓰고 있는 굴뚝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지역은 "요정의 굴뚝들"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수도 고행자들이 이곳에 굴을 파고 은둔 생활을 함에 따라 "수도원 골짜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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