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 출생지 다소를 찾아서
다소: 터키 현재 지명은 타르수스(Tarsus)
클레오파트라 문
터키에 먼저 도착 하게 되면 이스탄불에 도착하게 되는데 다소(터키 현지명: 타르수스)는
아다나시에 속해 있기에 터키 국내선을 이용하여야 한다.
이스탄불-아다나는 국내선으로 1:30분 소요가 된다.
다소는 터키 아다나(ADANA)시 이첼iCEL(Mersin)주 현지명: 타르수스(Tarsus)에 위치하고 있다.
이스탄불에서 약 930킬로 지점이며 아다나(Adana) 샤키르파샤(Sakirpasa)공항에서
42Km지점, 메르신(Mersin)에서 3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34,820명(2000년)
살고 있는 소읍도시이다.
이곳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훌륭한 사도 바울의 고향이다.
사도바울 우물에 있는 안내판
현재 도시의 남서 외곽에 있는 괴즐뤼 쿨레 (GozluKule)에서 헤티 골드먼이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에 행한 발굴 결과, 약간의 공백기를 제외하고는 그곳에 신석기시대부터
이슬람시대까지 정착민들이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자 그럼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타르수스에 대한 최초의 역사기록은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리브(BC 705~681 재위)의
타르수스 재건에 관한 것이다. 그 후 아케메네스 왕조 (아케메네스 제국을 세우고
다스린 이란의 고대 왕조(BC 559~330).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패배하고(BC 330) 죽자 이 왕조는 사라졌다.
BC 333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알렉산드로스 3세: 바빌론에서 유프라테스 강의
관개시설을 개량하고 페르시아 만 해안지방에 정착촌을 만드는 사업계획으로 분주하던
중에 장시간의 연회와 술잔치 끝에 갑자기 병에 걸렸다. 10일 후인 BC 323년 6월 13일 그
는 33살의 나이로 죽었다.)이 이곳을 지배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도시들
셀레우코스 왕조(셀레우코스 1세는 마케도니아의 장군이며, 셀레우코스 왕조의 창건자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323)에 벌어진 내분 속에서 그는 바빌론의 총독이 되었고,
다시 시리아와 이란을 중심으로 한 대제국의 왕이 되었다. 그의 인상적인 얼굴과 당당한 인격을
잘 전해주는 청동흉상이 이탈리아의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되어 현재 나폴리에 보관되어 있다.)
의 지배를 받았다.
BC 67년에 타르수스는 로마의 새로운 속주인 실리시아에 합병되었다. 이곳에는 대학이
세워져 그리스 철학파를 꽃피운 것으로 유명해졌다.
다소가 로마제국에 속하게 되면서 키케로(Cicero, Marcus Tullius)가 BC 51-50년 사이에
총독으로 있었으며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로마초대 황제(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독재정치로 공화제가
무너진 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그는 회복된 공화정의
수 뜻하는 '프린켑스'(제1시민)로 자처했기 때문에 그의 통치는
알려졌지만, 공화정의 회복은 겉모습에 불과했고 사실상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는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로마 생활의 모든 측면을 교묘하게 효율적으로 관리했으며, 그리스·로마 세계에 지속적인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는 보기 드물게 잘생기고 평생 기품을 잃지
않았지만,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은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대화를 나눌 때나 침묵을 지킬 때나 차분하고 온화했다……그는 반짝이는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이 눈에 일종의 신통력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누군가를 날카롭게 쳐다볼 때 상대가 마치 눈부신 햇살을 받은 것처럼 고개를 떨구면, 그는 몹시 즐거워하곤 했다. 그의 치아는 사이가 넓게 벌어지고, 크기가 작았으며, 별로 손질이 되어 있지 않았다. 머리는 약간 곱슬거렸으며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눈썹은 양쪽이 거의 맞닿아 있었다……안색은 검은색과 흰색의 중간이었다. 키가 작았지만 탄탄하게 균형 잡힌 훌륭한 몸매가 이 결점을 감추어주었다. 그보다 키가 큰 사람과 나란히 섰을 때만 그의 키가 작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도 도시를 방문했다.
카이사르(Caesar, Gaius JuliusBC 100. 7. 12/13 로마~BC
BC 41년에는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가 조공을 받기 위해 여기 있었는데, 이때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클레오파트라 문을 세웠다. 사도 바울 시대에는 다소가 대학도시로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할 정도였다고 하니 헬라 철학과 문화가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클레오파트라 7세, 부조(부분), 이집트의 단다라에 있는 Temple of Hathor 소장
AD 641년에 아랍이 침입하여 이 도시를 파괴했지만 타르수스가 그 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비옥한 토양, 실리시아 관문의 남단이라는 유리한 위치(타우루스(Toros:3,756M 산맥의 유일한 주요 통로), 타르수스와 레반트 지역을 긴밀한 관계로 맺어준 레그마 항 덕분이었을 것이다.
1087년에는 셀죽 투르크인들이 점령하여 1097년 십자군들이 여기에 들어올 때까지 이 도시를 지배하였고, 결국 다소는 1515년 오스만 터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 다소는 조그마한 상업도시로 전략했지만, 이곳 채소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도 바울의 우물’이라고 부르는 로마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우물이 있다.
바울이 어딜 때에 이 우물의 물을 마시고 이 곁에서 자란 것 같다. 마을 한가운데는 사도 바울의 기념교회가 있다. 길리기아 평원의 비옥함이 다소의 부를 가져왔으며, 특산물은 직조와 천막 제조업이었다.
바울도 천막을 제조하는 직업적인 기술을 가졌으며 전도활동 중 생활수단으로 이 기술을 사용하기도 했다(행
사도 바울도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기 고향 다소를 소읍이 아니라고 했다(행21:39).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소읍이 아니라는 말은 작은 도시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보통(ordinary) 도시가 아닌 중요한(important) 도시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 생가 우물 전경
마지막으로 유적지는 사도바울의 우물과 타르수스 박물관이 있으며,
고대의 타르수스는 12미터의 간격이 있는 3개의 분리된 방어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지만 남아있는 유적으로는 바다 옆에 있는 성문이 “클레오파트라의 문”이라 한다.
타르수스 근처에 있는 예술작품 및 기타 유적지도 볼만하며,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7명의 잠자는 사도들의 동굴이다.
그 밖에 쥬스티니안 다리, 알렉산더 목욕탕, 로마 동굴 묘지, 그리고 16세기에 지어진 오스만 사원인 울루자미 등이 남아 있어 로마시대의 영화롭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 기념교회 내부
키즈 칼레(처녀의 성) 해변에서
Mersin에서 서쪽으로 차를 타고 가다 보면 키즈 칼레(처녀의 성)라는 지중해에 있는 조그만 섬위에 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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