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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강화) 전등사 2025 부처님 오신 날의 풍경

 

언제 : 2025년 5월 5일 일요일

어디 :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며칠 전 일기예보에

어린이날 비 내린다기에 엊그제 세 살, 두 살 손자들과 드림파크 넓은 잔디밭에서 손자들

뛰어노는 모습 보며 하루를 보냈는데,

정작

오늘 새벽에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강화 지역에 비 내리지 않고 흐리기만 한다기에

마침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기에

불자는 아니지만 강화도 전등사 부처님 오신 날 법회에 참석했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

찾아오는 누구에게도 보람을 갖게 하는 천 년 고찰이다.

 

 

 

08:00 

비 내리지 않기에 틀림없이 강화 가는데 엄청난 교통 체증을 생각해

나름 일찍 집을 나서 인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검단사거리역에서 강화 전등사 가는 버스에 환승

양곡까지 잘 달리던 만원 버스가 드디어 가다 서다를 한다.

여기저기에서 불평을 한다.

내 옆에 앉은 분에게 강화 무얼하러 가시냐고 물으니 쑥 캐러 가신단다.

불자들도 많지만 쑥 캐러 가시는 분들도 많은 모양이다.

 

 

 

10:25

온수리 정류장에 내려 부지런히 걸어 전등사 입구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이 법회장으로 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벌써 예불을 드리고 나오고 있다.

 

 

 

 죽림다원

전등사 방문하면 항상 향 좋고 맛 좋은 차를 마시던 전등사 전통 찻집이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전등사 대웅전

 

 

법회장에 들어서니

행사 시작을 알리는 범종각 북소리가 스님의 장단에 맞춰 울리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다.

늦었지만 내가 이제라도 부처님 오신날 법회장에 왔다는 것에 안도감인가?

아니면 뉘우침인가? 

 

 

법회장은 대웅전 앞이 아닌 극락암과 명부전 앞에 커다란 괘불을 걸어놓고

그 앞 제단에는 각종 과일과 다과가 정돈되어 있고

제단 아래에는 관불의식(灌佛儀式)에 사용할 아기부처님 상이 있다.

 

관불의식(灌佛儀式) : 부처님오신날 사찰에서 아기 부처님 상에 바가지로 물을 부어 목욕시키는 모습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장면

 

 

 

 

 

 

 

 

 

전등사 법회장에 아주 특이하게 세 개의 상이 있다.

좌측 : 이색  - 중앙 : 정화공주 - 우측 : 배중손

 전등사와 역사적 관련이 있는 세 분의 고려인이다.

 

 

 

 

 

 

 

 

전등사 전경

 

 

대웅전 나부상(裸婦像)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고,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유추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 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 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소. 찾을 생각일랑 마시오.”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나부상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부상 전설이 사실이라면 도편수는 왜 나부상을 조성했으며,

스님들은 왜 처마 밑에 나부상을 조성하는 것을 용인했을까?
단순히 사랑하는 남자를 버리고 떠난 욕심에 눈먼 여인을 단죄하고자 하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한 나부상들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학계에서는 대웅보전 처마 밑의 조각상들이 나부상들이 아니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조각상들이 나찰(羅刹) 내지는 야차(夜叉)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상징 연구가인 허균에 따르면 이 조각상들은 “불교 외호 신중인 나찰로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양하며

불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반면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조각을 연구한 신은미는 “불법을 수호하는 야차”라고 해석했다.

나찰은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사찰의 수호신으로 조각되고, 야차는 인도 초기 석굴과 석탑의 출입문에

불법을 수호하는 수문장으로 조각되었다.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를 받치는 조각상의 역할은 불법과 불전, 불자를 수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밑 조각상들의 연원을

고구려 고분벽화의 ‘천장을 받치는 역사상’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일부 학자들은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밑 조각상들을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에 등장하는

원숭이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일부 학자들은 나부상이 원나라 제국대장 공주라고 주장한다.

그려 충렬왕의 첫 부인인 정화궁주가 자신을 괴롭히는 두 번째 부인인 제국대장 공주를 조각으로 형상화하여

지붕을 받치는 벌을 줬다는 것이다. 정화궁주는 충렬왕과 태자 시절 1남 2녀를 낳고 14년간 부부로 지냈다.

그런데 남편이 원나라 세조(쿠빌리아 칸)의 막내딸인 제국대장 공주와 정략결혼하자 후궁으로 전락해

전국대장 공주로부터 온갖 괴롭힘을 당했다. 충렬왕과의 만남이 금지되고 별궁으로 쫓겨났다.

고난의 시기에 정화궁주는 전등사에 옥등과 대장경을 전하였다.

전등사(傳燈寺)라는 사명(寺名)도 정화궁주가 전한 옥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 전등사 홈페이지에서 -

 

 

전등사 은행나무의 전설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로,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중에는 관리들도 섞여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소용없는 짓이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 전등사 홈페이지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