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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강화) 교동도 연산군 유배지

 

 

만일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없다면

강화도는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우리나라에서 네번 째로 큰 섬이다.

오늘 여행길은 강화도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는 교동도로 북한땅이 가까워 교동도를 입도하려면

교동대교 앞에서 무장한 군인들의 신분증 확인 후 교동대교를 건너게 된다.

 

오늘은 교동도 화개산에 있는

조선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이 1506년에 최후를 맞은 위리안치 유배지를 찾아

교동도로 간다.

 

 

 

 

 

 

 

 

 

 

 

 

 

 

 

 

 

 

 

 

 

 

 

 

 

 

 

 

 

 

 

 

 

 

 

 

 

 

 

 

 

 

 

 

 

 

 

 

 

 

 

 

 

 

 

 

 

 

 

 

 

 

 

 

 

 

 

* 안내판이 잘못된 듯 싶다.

연산군은 창덕궁에서 폐위되어 선인문을 거쳐 교동을 왔을 터인데,

경복궁에서 선인문을 거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연산군이 폐위되어 교동도로 귀양 온 것은 1506년(중종 1)으로,

 사망 후 그대로 교동에 묻힙니다.

7년 뒤인 1513년(중종 8)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가 이장을 으로,  경기도 양주(지금 서울 도봉구)로 묘를 옮겨갑니다. 

연산군과 교동도의 인연은 살아서 두 달, 죽어서 7년이었습니다.

 

화개정원 들어가 유배지 앞에 서면 제법 큰 비석이 먼저 보입니다.

‘연산군 유배지(위리안치)’라고 새겼고 뒷면엔 한자로 ‘燕山君流配址(圍籬安置)’라고 새겼는데,

위리안치는 유배 형벌 가운데 가장 가혹한 것입니다.

단순 유배자는 유배 지역 안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으나, 위리안치형을 받은 유배자는 감옥 같은 집에 갇혀

대문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위(圍)는 ‘에워싸다’, 리(籬)는 ‘울타리’라는 뜻으로, 안치(安置)는 안전하게 잘 모셔두었다는 뜻도 있고

죄인을 가두었다는 뜻도 있습니다. 위리안치의 안치는 죄인을 가두었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밖에서 대문을 잠가 외부와 접촉할 수 없습니다. 항상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산군 부인, 왕비에서 폐비가 된 신씨는 궁궐에서 쫓겨나 정청궁이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네요. 신씨는 남편 연산군 따라 교동으로 오려고 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아서 오지 못했습니다. 광해군은 강화로 귀양 올 때 부인과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왔지만, 연산군은 홀로 와야 했습니다.

가만있자, 연산군도 아들이 있었나? 예,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됐는지 말씀드릴게요.

반정 세력은 폐세자 이황을 강원도 정선에 안치했습니다. 창녕대군 이성은 충청도 제천, 양평군 이인을 황해도 수안, 이돈수를 황해도 우봉으로 보내 안치했습니다. 그리고 스무날도 지나지 않아 열 살도 안 된 어린애 넷을 모두 독약 먹여 죽였습니다.

1506년(중종 1) 9월 24일 박원종을 비롯한 대신들이 연산군 자식들을 '오래 두면 안되니 일찍 처단하라'고 중종에게 강력히

건의하여 연산군의 아들 넷은 연산군보다 먼저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