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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프랑스 -29) 르아브르, 오귀스트 페레가 재건한 도시

세계문화유산(257)/ 프랑스

 

르아브르, 오귀스트 페레가 재건한 도시

(Le Havre, the City Rebuilt by Auguste Perret; 2005)

 

르아브르는 오트노르망디 주(Haute-Normandie) 센마리팀 현(Seine-Maritime)에 위치하며

노르망디 북부 영불 해협에 있는 도시로 2차 세계 대전 때 심한 폭격을 받아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1945~1964년에 걸쳐

재건되었다.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 1874~1954)는 옛 도시 형태와 역사적 구조물을 잘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도시 계획과 건설 기술을 활용하여 행정・상업・문화 중심지로 재건하였다. 재건된 르아브르 시

통일적인 방법론과 조립법의 사용, 모듈 단위 시설망의 체계적인 사용, 콘크리트의 활용 등에서 전후 도시 계획과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정받는다.

센 강 어귀에 있는 르아브르는 루앙·파리 등 내륙으로 접근하는 데 전략적 요충지였다.

강어귀와 늪지 때문에 루앙을 위한 항구를 건립하는 결정은 1517년에야 내려졌다.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결과, 

르아브르 항구는 다시 중요성을 인정받았고 1541년 프랑수아 1세가 시에나의 건축가 벨라르마토에게 항구를 확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생 프랑수아의 본부는 르네상스식 배관망 기획에 따라 설계되었다. 17세기에도 르아브르[항구]는 계속해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 상업적 교류를 발전시켰다. 르아브르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항만과 시가지가 파괴된 후,

오귀스트 페레의 지휘로 1945~1964년에 재건 계획이 실현되면서 도시가 살아났다. 이곳에 행정・상업・문화 중심지가

들어섰고, 그 결과 건축・기술・도시 계획에서 현대적인 발전을 이루며 개척자로서 업적을 인정받았다.

이는 조립 체계와 방법론의 통일성, 모듈 단위 시설망의 체계적인 사용, 콘크리트의 잠재력을 혁신적으로 활용한 점 등에 기초하고 있다. 이후 르아브르의 재건 계획은 도시 계획 전통의 이정표가 되었다. 르아브르 재건 계획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고안되었다. 오귀스트 페레는 에콜데보자르에서 공부하며 고전주의 정신을 훈련받은 사람으로 19세기 기술 발전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페레의 초기 건축 설계 가운데 파리 프랭클린 거리의 공동주택(1903), 랭시의 노트르담 성당(1923) 같은 건물은 초기 모더니즘의 걸작으로 인정받아 왔다. 르아브르 재건 계획은 토양 상태와 높은 배수구를 고려하여 지표에서 3.5m 가량 높은 곳에 강화 콘크리트 지반을 만들고 그 위에 도시를 건설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당시에 이것은 건물의 하부 구조를 이용하려는 혁명적인 창안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종합 계획은 실행에 옮겼지만 시멘트와 철강 부족으로 콘크리트 하부 구조 계획은 법적 실행력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이 사업은 기본적인 격자 모듈 6.24㎡에 기초하여 100m 격자망 위에 부지를 만들고 일부는 더 큰 부지를 만드는 데 연결되었다. 르아브르 재건 사업은 통일성과 조화로움을 창조하려는 건축가의 이상에 따라 진행되었고, 모든 세부 구조를 같은 패턴으로 설계하여 도시 규모에서 일종의 종합 예술을 창조하였다. 페레는 가장 중요한 공공건물들을 그의 개인적인 설계 계획으로 남겨 두었으며, 폭격으로 파괴되지 않은 몇몇 건물들을 새로운 도시 구조의 일부로 자리 잡도록 했다. 생 프랑수아 본부도 파괴되었지만 역사적인 건물들 중 일부는 당당히 제자리를 지키며 1946년에 보호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의 도시 계획은 주로 옛 거리를 유지, 복원하는 형태에 기초했다. 센 강 어귀에 있는 르아브르는 루앙, 파리 등 내륙으로 접근하기 좋은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강어귀와 늪지 때문에 16세기(1517)에야 루앙으로 연결되는 항구 건설이 결정되었다.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르아브르 항구는 그 중요성을 다시 인정받았고, 1541년 프랑수아 1세가 시에나의 건축가 J. 벨라르마토에게 항구를 확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 지역은 생 프랑수아의 본부로 르네상스식 그리드 플랜(grid plan)에 의해 설계되었다. 17세기에도 르아브르 항구는 아메리카, 아프리카와의 무역항으로 계속 발전했다. 한편 콜베르 수상은 무기고를 건설하고 군함 조선소를 페리 지역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1779년에 라파예트가 미국과 전쟁하기 위해 군대를 출발시킬 때도 르아브르 항구를 이용했다. 건물 디자인과 광장들은 정사각형인 6.24㎡ 모듈을 바탕으로 건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 음악적인 조화로움을 선사하였다. 주민들의 평균 밀도는 1㏊당 전쟁 전의 2,000명에서 800명으로 줄어들었다. 도시의 정신은 신고전주의에 기반을 두면서 블록 단위로 구획되긴 했지만 거리는 예전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페레의 재건 사업은 구조 설계에 가장 큰 특징이었으며, 특히 강화 콘트리트 재료를 아방가르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포토 달(poteau dalle)이라고 하는데 구조를 모듈화하고 완전히 투명하게 해서 모든 구조 요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 구조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모든 건축에 지배적인 특성과 특정한 통일성을 부여하게 되고,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지루하지 않도록 솜씨 있게 활용된다. 르아브르 도시의 포르트 오상(Porte Oceane)은 포크 거리로 들어가는 기념비적 입구로, 바다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전쟁 때 파괴된 옛 정문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포르트 오상은 건설 사업의 구조 체계와 건설 방식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실험적인 ‘연구소’가 되었다. 생 로크 광장은 옛 공원과 묘지 자리에 위치하며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방향성을 주고 있다. 오텔 드빌(The Hotel de Ville; 시 청사)은 전체적으로 가장 기념비적 구조이며 그 중앙부에는 높이 70m의 18층짜리 탑이 우뚝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