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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강화) 봄이 오는 천 년 고찰 전등사(傳燈寺)

 

언제 : 2023년 3월 21일 화요일

어디 :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3월이 다 가는데,

 봄마실 한 번 나가지 못하여 오늘은 마음먹고 강화도 전등사를 찾았다.

 

아직

먼 곳을 다녀오기는 몸이 불편하지만

 햇볕도 좋아 전철과 버스 환승을 하며 초지대교를 건너는데 염하를 경계로 미세먼지가 짙다.

춘분이어서인지 전등사에는 평일임에도 사람이 많다.

 

봄꽃 대신

 부처님 오신 날(5월 27일)은 두 달이 남았는데, 전등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연등을 달고 있어

봄꽃처럼 화사하다.

 

전등사(傳燈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의 정족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정족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많은 보물이 소장되어 있다.

 

경내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가 있다.

고구려 시기부터 사찰이 세워져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사찰이며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고 중수되었다.

전등사란 이름은 고려 후기 충렬왕 때 붙여진 것이고,

현재의 건물은 조선 광해군 때 중수된 것이다.

 

 

 

 

 

 

 

전등사 남문에는 봄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아직

새싹은 나오지 않았지만, 겨우내 동토에서 잘 견디어 곧 새싹을 틔울 듯싶다

 

 

봄꽃 보러 왔더니 꽃은 몇 곳 피었고

부처님 오신 날도 두 달이나 남았는데 대웅전 마당에는 봄꽃 대신 연등을 달아 화사하다.

 

 

 

 

 

佛身普邊十方中(불신보변시방중)

부처님은 온 세상에 두루 계시며

 

月印千江一切同(월인천강일체동)

천 개의 강에 달그림자 비춤이 모두 같고

 

四智圓明諸聖士(사지원명제성사)

사지에 원만히 밝으신 모든 성인들이

 

賁臨法會利群生(분림법회이군생)

법회에 왕림하시어 모든 중생 이롭게 하시네

 

 

 

 

 

묘법연화경 목판(妙法蓮華經 木板)

보물 제1908호

묘법연화경 목판은 대승 불교에서 가장 널리 읽힌 경전인(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木板)을 새긴 것으로

전등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묘법연화경은 법화경이라고도 하며, 화엄경과 함께 불교 사상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이 목판은 성달생의 글씨로 세종 25년(1443)에 완주 화암사에서 새긴 것을

중종 38년(1543)에 마니산 정수사에서 복각한 것이다. 현재 전체 105판 가운데 104판이 남아 있으며,

그중 1판은 한국 전쟁 당시 외부로 유출되었다.

 

이 목판은 한 면에 2장을 새겨 양쪽이 총 4장으로 되어 있으며,

104판에 총 411장으로 판각되었다.

 

 

 

업경대(인천 유형문화재 제47호)

627년(인조 5)에 제작된 전등사 업경대(인천유형문화재 제47호)

죽은 사람이 생전에 지었던 죄업을 보이게 하는 거울로 염라대왕이 갖고 있다고 하며

업 경륜이라 부르기도 한다.

저승에 가면 생전의 선업과 악업이 그대로 비추어진다는 업경대는 죄를 짓지 말고 선행을 행하라는 경책을 담고 있다.

전등사 업경대는 목각 사자의 몸체와 등위에 커다란 불꽃이 활활 일어나고 있는 무늬의 거울이 꽂혀있는데,

불꽃 무늬를 사실적으로 드러내 저승의 무서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채색한 색상이 화려하고 이빨에서 머리, 꼬리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동경·단청·명문 등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전등사 대웅전 안 기둥

 고종 3년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결사 호국의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장병들이 그들의 무운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 

대웅보전 기둥과 벽면에 전쟁을 하는 심정과 그들의 영혼을 부처님께 의지하던

간절함을 알 수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 나부상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전등사 대조루(傳燈寺 對潮樓)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식 건물이다

전등사 대조루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 (牧隱 李穡)의 "전등사 시"에서

읊은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는 이미 대조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사찰안의 건물들을 수리하면서 대조루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전등사(傳燈寺)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현존하는 한국의 사찰 중 가장 역사가 길며, 아도화상이 처음 절을 지을 때는 진종사(眞宗寺)로 명명했다.

고려 고종 46년인 1259년에 진종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으로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고려는 1232년부터 1270년 사이 강화도에 임시 도읍을 정했다. 1266년 진종사는 크게 중창되었으며, 

충렬왕 8년인 1282년 충렬왕의 왕비 정신부주(정화궁주)가 진종사에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등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뜻한다.

 

고려 왕실은 전등사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계속해서 중수가 이루어졌으나, 

조선 광해군 대에 이르러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어 1621년 재건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마니산 사고가 병자호란으로 훼손된데다 효종 4년(1653년) 화재로 소실되자

1660년 전등사 경내에 정족산 사고를 설치하고 실록을 보관하게 하였다.

 

정족산 사고는 적장산, 오대산, 태백산과 함께 조선 후기의 실록 보관소가 되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고를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고는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1726년에는 영조가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고,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를 중수하였다.

 

한때 한용운과 만공의 상좌인 춘성이 주지로 근무하기도 했다.

- 위키백과 모셔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