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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제주 여행

(제주) 전통마을과 돌하르방

 

제주초가는

주위 지형보다 낮은 곳에 돌담을 두르고 건물을 별동으로 배치했다.

안거리(안채) 한 채와 부속채로 이루어진 집을 '외거리집', 안팎거리 두 채의 집으로 이루어진 집을

'두거리집'이라 하며, 안거리와 밖거리(바깥채)가 마당을 중심으로 二자로 마주보거나 ㄱ 자로 배치했다.

그리고 안거리와 밖거리, 부속채의 목거리를 포함하여 세 채로 이루어진 집을 '세거리집',

안거리와 밖거리, 목거리, 이문간 등 네 채 이상으로 이루어진 집을 '네거리집'이라 하며,

안거리를 기준으로 하여 밖거리, 목거리 등은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구성하고 있다.

 

제주도의 건물 배치는 육지의 주거건축과는 전혀 다르다.

육지는 남녀의 공간을 구분하여 바깥마당, 사랑마당, 안마당으로 마당의 성격에 따라 건물의 배치가 달라진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외형적으로는 대가족이나, 실제로는 핵가족인 특유한 가족제도를 지니고 있어서

공간을 세대별로 구분하는 안ㆍ밖거리형 주거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두 세대는 각각 정지, 장독대 등을 따로 마련하고 침식과 생산 경영은 두 단위로 이루어진다.

주거 단위로 보면 한 가족이나 경제적 단위로는 두 가족인 셈이다.

제주도의 주거건축의 기본형이 세칸집이라면 챗방이 있는 네칸집은 완성형이라 할 수 있다.

챗방은 식사공간으로서 주부의 가사노동을 절감시키고

동시에 식사공간의 위생적인 면을 고려하여 분리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대형수형석(熔岩樹型)

나무 둥치 표면에 의해 형성된 용암류내의 실린더형 구멍으로,

현무암질 용암류가 흘러갈 때 나무 둥치와 접촉하게 되면 접촉부의 용암은 빨리 냉각 고화되고,

용암류가 낮은 곳으로 흘러가버리면 나무모양의 둥근 기둥이 생긴다.

둥근 기둥 내부의 나무는 타서 숯이나 재로 변하여 제거되어 남긴 구멍을 말한다.

(내부직경 : 60cm)

 

 

 

 

 

 

몰방애

몰방애는 탈곡한 보리나 조 등을 찧을 때 사용되는 것으로 연자매(연자방아)를 말한다.

이것은 방애, 가레 라고도 불렸으며 제주도에는 마을마다 4~5개씩, 

또는 30호(戶)에 1개 정도 설치되었다. 몰방애 받침돌인 아랫돌 위에 중수리라는 기둥을 중심으로

윗돌이 회전하면서 탈곡한 곡식을 정미한다. 사람이 주로 돌렸으나 소나 말의 힘을 이용하여 돌리기도 했다.

원동기와 전기의 보급으로 정미소가 세워지면서 몰방애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정주석

마을길에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올레라고 한다.

올레 양 어귀에는 구멍이 뚫려있는 나무기둥이나 돌기둥을 세워 놓았다. 나무로 되어있는 것을

"정주목" 돌로 되어있는 것을 "정주석"이라 불렀다.

정주석에는 1~5개의 구멍이 뚫려 있고 양쪽 좌우 구멍에 걸쳐 놓는 횡목을 정낭이라 부른다.

정주석에는 경계표시, 소와 말의 출입방지, 주인이 집안에 있고 없음을 전달하는

수단 등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오백장군 석상

한라산 "영실'이라는 명승지를 배경으로 전해 내려오는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신화 속에

어머니를 그리며 한없이 통탄하다가 바위로 굳어져 버린 오랩아들의 심상을 다양한 형태의 사람 머리 모양의

자연석들을 이용하여 오백장군들을 형상화한 석상들이다.

 

 

 

돌하르방 - 제주도민속자료 제2호/복제 - 조선

돌하르방이란 말은 "돌 할아버지" 라는 제주어로, 원래는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 옹중석 등으로 불렸다.

돌하르방은 성문 입구에 서로 마주보게 배치되어 마을의 평안과 용성을 기원하는수호신적 기능, 벅수나 장승과 같이

사악한 것을 막아주는 주술.  종교적 기능. 성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의 구분이나 성문 출입을 제한하는 

위치 표시 및 금표적 기능 등을 지닌다.

돌하르방은 1754년(영조 30년) 김몽규 목사가 세웠다고 한다.

대정현과 정의현에는 동 서 남문 밖에 각각 4기씩 12기를 세웠으며 제주목에는 23기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동. 서. 남문에 각각 8기씩 세웠으나 1기는 없어져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제주도에는 45기의 돌하르방이 남아있고 2기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돌하르방의 평균 신장은

제주목의 것이 181.6cm, 대정현 136.2cm 이다.

제주목의 것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음각선이 굵고 힘찬 느낌이 강한 반면, 

정의현과 대정현의 것은 작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돌한마을 전경

제주돌문화공원 남쪽 부지 35000(10,000여 평)은

큰지그리오름, 작은지그리오름, 바농오름, 이렇게 3개의 오름과 곶자왈, 그리고 너른 초지에 아늑하게 둘러싸여 있어

전통마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돌이 많은 ‘돌한 마을’ 이다.

 

제주전통돌한마을은 19가구, 건물동수는 49동, 우마통, 밭 말방거리, 거릿길, 올레, 마을 정자등을 조성하며

2011년 12월에 완공하였다.
전통초가마을은 외거리집, 두거리집, 세거리집, 네거리집, 종가집 등 다양한 규모의 초가를 재현하고,

마을 주변에는 새밭을 조성하여 옛 제주마을의 분위기와 돌담 따라 마을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곶자왈 숲을 기대어 산담을 만들고, 마을 초입에는

우마통, 마을사람들의 쉼터, 회의장이 되었던 쉼팡을 만들어 소단위 마을공동체를 구성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조성하였다.

 

 

비석거리

제주시 화북동, 조천읍 일원(재현)

설촌 연대가 오랜 마을에는 중심지나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마을의 발전을 위해 공헌한 

사람들의 공적이나 관리들의 치적, 열부나 열녀, 효자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이를 "비석거리"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제주성과 가까운 화북포와 조천포는 내륙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포구였으며, 제주목사나 판관 등 지방 관리들이 이곳을 거쳐 부임 또는 이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을에서는 이들의 임기동안에 베푼 고마움과 석별의 뜻을표시하기 위해서 비석들을 세워 놓았다.

보통 "선정비(善政碑)" 라 부르지만 "불망비(不忘碑)" 거사비(去思碑)" 청덕비(淸德碑)" 라고

새겨진 것도 있다.

 

 

 

 

 

 

 

- 오백장군상 -

 

 

 

어머니의 방

밭 가운데 쌓아 놓은 돌무더기를 제주어로 "머들"이라고 하는데,

이 머들의 형태로 용암석굴을 만들어 45cm 수면 위에 진귀한 용암석 하나를 설치해 놓았다.

이 용암석은

바다보다 깉고 산보다 높은 모성애의 화신이 된 설문대할망이 사랑하는 아들을 안고 서 있는 모습으로,

특히 벽과 수면 위에 비친 그림자가 일품이다.

(용암석 높이 160cm, 폭 45cm)

 

 

지나고 보니 아쉬운 생각이 든다.

좀더 자세히 살펴볼 걸......

 

사실

제주도 여행에서 제주돌문화공원은 한번은 둘러볼 곳이지만,

제주 여행에서 하루를 이곳에서 보낸다는 일은 쉽지 않기에 눈요기감이라 생각하고

급히 지나친 곳들이 이제와 사진들을 보니 아쉬움이 크다.

 

특히

전통마을은 보긴 보았지만, 맛을 모르겠다.

다음 기회가 온다면 다시 한번 돌문화공원을 찾아 전통마을도 자세히 보고 싶다.

 

- 설문대할망전시관 -

설문대할망전시관은 현재 공사 중으로 관람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