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문화유산

(시리아 -3) 팔미라 유적(Site of Palmyra; 1980)

세계문화유산(162)/ 시리아

팔미라 유적(Site of Palmyra; 1980)

 

 

 

 

 

 

 

 

 

 

 

 

 

 

 

 

 

 

 

 

 

 

 

 

 

 

 

 

 

 

 

 

 

 

 

 

 

 

 

 

 

 

 

 

 

 

 

 

 

 

 

 

 

 

 

 

 

 

 

 

 

 

 

 

 

 

 

 

 

 

 

 

 

 

 

 

 

 

 

 

 

 

 

팔미라는 시리아 다마스쿠스(Damascus) 북동쪽의 시리아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다.

고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 중 하나로 대도시의 기념비적인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1세기부터 2세기까지 다양한 문명의 교차로에 있었으며,

이러한 팔미라의 예술과 건축은 전통 기술에 그리스 로마 기술이 가미되고 페르시아의 영향이 혼합된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팔미라는 고전주의 건축 양식과 현대 도시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도시는 아고라, 극장, 신전과 같은 큰 공공건물이 있는 고대 도시의 복합 단지를 완벽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와 함께 거주민이 살고 있는 구역도 보존되어 있으며, 요새 밖에는 거대한 공동묘지도 있다.

현재 세계 박물관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는 팔미라의 예술은 그리스 로마 예술 형식과 전통 형식,

페르시아의 영향을 독창적인 양식으로 결합한 것이다. 이 도시는 몇몇 문명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특히 묘지 조각에 독특한 예술이 가미되어 있다.

 

시리아 사막 중심 산악 통행 지역 근처의 비옥한 오아시스 지역에 있는 팔미라에는 선사시대 이후,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까지 사람이 거주하였다.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알샴(Al-Shaam)과

이라크・아라비아 만과 페르시아, 그리고 지중해 사이의 기착지로 발달할 수 있었으며,

부유한 상인들의 무역로를 잘 활용하여 번창했다. 

팔미라는 페트라(Petra)가 담당했던 중간 경유지 역할을 이어받아

동양의 물건들을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에 내다파는 중요한 시장이 되었다.

서기 105~106년,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가 이 도시를 아라비아의 새로운 주로 통합하고, 나바테아(Nabatea)를 병합하면서 동양과의 무역을 관장하는 속주가 되었다. 3세기에는 사산 왕조가 파르티아(Parthians)의 왕위에 즉위하고 로마를 적대시함에 따라 팔미라도 전략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셉티미우스 아데나투스(Septimius Odaenathus)는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서 로마에 협력함으로써

로마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황제가 파르티아의 왕에게 패한 후 포로로 잡혔을 때,

아데나투스는 제국과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를 보호하겠다는 태도를 보였으며

연속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그는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어린 아들 와발라트(Wahballath)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그로 인해 그의 어머니인 제노비아(Zenobia)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들의 지도 교사로 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us)를 궁정에 초대하였다.

제노비아는 시리아를 모두 정복하고 이집트와 아나톨리아(Anatolia)까지 세력을 뻗쳤다. 

팔미라는 처음에 정복을 면할 수 있었지만 반란을 꾀함에 따라 곧 함락되고 약탈당하여 도시의 성벽까지 파괴되었다.

이때 도시가 쇠약해지기 시작하였지만 팔미라의 여왕인 제노비아의 신화 같은 이야기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그녀는 훌륭한 남녀가 갖추어야 할 덕의 화신으로 고대 세계가 붕괴된 이후까지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팔미라는 기원전 44년부터 기원후 272년까지 부유한 상인들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고 독립국이기도 하였으며, 2세기와 3세기에는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길 양쪽으로 웅장한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 1,100m 길이의 도로는 도시의 축을 형성하고 있고,

두 번째 기둥들이 서 있는 교차로는 바알 신전・디오클레티아누스의 주둔지・아고라・극장・기타 신전과

도시 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기둥이 받치고 있는 포르티코(portico)는 기둥들이 서 있는 주도로와

수직으로 이어지는 작은 도로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2세기의 것이다.

 

콜로네이드(colonnade)는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두 부분이 서로 일렬로 정렬된 것도 아니며,

세베루스 시대의 것인 3개의 아치 개선문에서 직선으로 뻗기 전에 급회전하는 곳도 있다.

또한 테트라필론(Tetrapylon)이라고 하는 웅장한 기단 위에 세워진 두 쌍의 기둥과 열을 맞추고 있다.

32년에 세워진 신전은 성역의 중간에 서 있었으며 나중에 포르티코를 댄 벽으로 둘러쌌는데

내벽은 기둥들이 이중으로 열을 지어 있었고 외벽은 우아한 코린트식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주 지역 밖의 도시로 이어지는 4개의 주도로를 따라가면 세 가지 양식으로 된 묘지가 4개 있다.

가장 오래된 탑 모양의 무덤은 부유한 가문의 것이며 사암으로 높이 쌓은 형태이다.

맨 앞에 있는 ‘엘라벨의 탑[Tower of Elahbel]’ 중간에는 석관을 넣은 아치가 있으며,

고대에는 비스듬히 누운 조각상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통로와 내실은 주검을 세로로 안치하도록

칸이 구분되어 있으며 고인의 모습이 새겨져 색이 칠해진 석판으로 덮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