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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레바논 -3) 안자르 유적(Anjar; 1984)

세계문화유산(153)/ 레바논

안자르 유적(Anjar; 1984)

 

 

 

 

 

 

 

 

 

 

 

 

 

 

 

 

 

 

 

 

 

 

 

 

 

 

 

 

 

 

 

 

 

 

 

 

 

 

 

 

 

 

 

 

 

 

 

 

 

 

 

 

 

 

 

 

 

 

 

 

 

 

 

 

 

안자르는 레바논의 베카 주(Beqaa Governorate) 잘레 지역(District of Zahle)에 위치하며, 8세기 초에 칼리프 알 왈리드 1세(Al Walid Ⅰ)가 건설한 도시이다. 이 유적은 매우 정돈된 배치의 고대 궁전 도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도시는 우마이야(Umayyad) 왕조 지배 시대의 도시 계획을 보여 주는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안자르는 우마이야 왕조 도시의 옛 모습을 보여 주는 내륙 상업 중심지의 유일한 역사적 사례이다. 홈스와 바알베크(Baalbek)를 티베리아와 연결하며, 마운트레바논과 다마스쿠스를 잇는 도로에서 멀지 않은 베카 유적은 1949년 고고 발굴을 시작했을 때 발견되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던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 안자르는 8세기 초에 칼리프 왈리드 1세에 의해 건설(705~715)되었다. 석조로 쌓여진 성벽에서 그리스, 로마, 초기 기독교 건물들이 재사용한 요소들이 자주 발견된다. 도시의 이름은 아랍 어로 ‘바위에서 샘솟는 물’이라는 의미의 ‘아인 알자르(ayn al-jaar)’에서 딴 것으로 근처의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을 가리킨다. 이 놀라운 창조적 도시는 완성되지 못하고 744년에 잠깐 존재했을 뿐이다. 마르완 벤 모하메드(Marwan ben Mohammed)가 왈리드의 아들인 칼리프 이브라힘을 안자르 성벽 밖에서 물리치고, 마지막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가 되었다. 이후 안자르는 일부 파괴되고 방치되었다. 그를 이어 아부 알 피다(Abu al Fida)와 같이 티레(Tyre)의 윌리엄(William)도 12세기에 수많은 전투에서 패배를 당했다. 이 지역은 유일하게 해안이 아닌 곳에 있는 무역 도시로서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도시에 들끓기 전 겨우 20~30년 동안만 번성하였고, 곧 버려졌다. 전성기에는 상점이 600개가 넘었으며, 로마 양식의 공중목욕탕과 두 곳의 궁전, 한 군데의 사원이 있었다. 발굴 유물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옆으로 40개의 탑이 세워진 요새 도시가 드러났는데 741년부터 이어져 온 비문을 이전 그대로의 위치에서 아직도 볼 수 있다. 직사각형 모양의 요새화된 성벽은 정확하게 맞추어 건설했다(385m X 350m). 성벽의 두께는 2m이며, 가운데에는 진흙과 자갈을 넣고 바깥쪽으로는 상당히 큰 네모난 덩어리를 쌓고, 내부에는 작은 덩어리를 쌓았다. 안쪽으로는 세 면의 각각에 3개의 계단을 만들었다. 그 계단을 통해 성벽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경비병이 돌아다니면서 도시를 보호하였다. 현관 지붕을 얹은 문을 세우고, 남북 방향의 축(cardo maximus)과 약간 짧은 동서 방향의 축(decumanus maximus)으로 도시를 네 구역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하수 시설을 모아 놓았다. 공공건물과 사유 건물을 엄격한 계획에 따라 배치해 주요 궁전과 모스크는 남동쪽 구역에 부차적인 궁전과 공중목욕탕은 북동쪽 구역과 북서쪽 구역에 두었으며,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 찬 남서쪽 구역은 직각 배치로 건설된 도로의 교차 지점에 있다. 놀랍도록 잘 짜인 도시의 공간 구조는 로마 군대의 야영지나 식민 도시의 구조보다는 왕실 거주지의 구조를 연상시킨다[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의 도시 궁전 구조]. 유적은 4개의 출입구가 있고 2개의 축이 교차하며, 우마이야 궁전의 외벽과 열주, 3개의 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구조물들은 로마 시대의 장식 요소나 건축 요소를 담고 있지만 건축물 내의 현대적 장식이 보여 주는 놀라운 적응성은 주목할 만하다. 우마이야 왕조가 다른 문화의 건축술 전통에 의존하고 있다는 더 많은 증거가 우마이야의 공중목욕탕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로마 공중목욕탕의 전통적인 세 가지 특징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목욕을 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목욕하고 나서 휴식을 취하는 의복 보관실, 냉탕과 열탕, 온탕이 있다. 의복 보관실의 크기는 목욕탕이 단순히 몸을 위한 장소만이 아니라 사교의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점이 600개나 있는 데다 안전에 신경을 많이 쓴 도시라면 당연히 많은 사람이 거주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고고학자들은 넓은 거주지 유역을 찾았고, 남서쪽에 있는 네 개의 기둥 건물(tetrastyle) 너머에서 그것을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