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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사우디아라비아 -2) 애-디리야의 아-투라이프 지구

세계문화유산(139)/ 사우디아라비아

애-디리야의 아-투라이프 지구(At-Turaif District in ad-Dir'iyah; 2010)

 

 

 

 

 

 

 

 

 

 

 

 

 

 

 

 

 

 

 

 

 

 

 

 

 

 

   아라비아 반도 중심부의 리야드(Riyadh) 북서쪽에 있는 애-디리야의 아-투라이프 유적지

사우드(Saud) 왕조의 첫 번째 수도였다.

15세기에 건립된 이곳은 특히 나즈드(Najd)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18세기와 19세기 초에 정치적・종교적 역할이 증가했으며, 아-투라이프에 있는 성채는

사우드 가문의 권력의 중심지였다. 또한 이슬람교 내에서 와하비즘(Wahhabism) 개혁의 확산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왕궁들과 애-디리야 오아시스 가장자리에 지은 도시 건축물들이 유산으로 남아 있다. 

아-투라이프 지역은 애-디리야에 있는 와디(wadi; 간헐 하천) 오아시스의 낮은 석회암 평원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도시의 건축 기념물은 29㏊나 뻗어 있다. 애-디리야는 18세기 말에 사우드 가문의 통치 아래 강력한 중심지가 되었는데 사우드 가문은 이곳에 독특하고 자신감 넘치는 왕궁들을 많이 지었다.

아라비아의 주요 계곡 중 한 곳을 따라 형성된 애-디리야 주거지는 자연 환경, 자원과 인간과의 친밀한 관계,

그리고 땅을 이용했던 인간의 노력 등을 엿볼 수 있다. 표면에 가까운 풍부한 지하수면과

와디 하니파(Wadi Hanifah)의 비옥한 땅들은 와디를 근거지로 한 대규모의 오아시스 거주지를 성장하게 했고,

아-투라이프를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아-투라이프의 주택과 왕궁들은 와디 하니파 계곡 바닥에서 나온 진흙으로 지었다.

이 진흙은 충적 퇴적물인 토사와 모래가 자연스럽게 섞여서 강력한 점액질을 형성한 것이다. 물은 지하수면을 파낸 우물로 빠져나갔고, 이 우물들은 당나귀나 낙타들이 사용했다. 우물의 기원은 기원전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오래된 전통 방식의 진화를 보여준다. 당시 우물의 일부가 이 지역에 현존하고 있어 전통적인 농사법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애-디리야의 아-투라이프 지역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곳에서 민초들을 교화하고 생을 마감한 위대한 지도자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하브(Mohammed Bin Abdul Wahab)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1745년 애-디리야에서 무함마드 빈 사우드(Mohammad Bin Saud)가 동맹을 이끌자 아라비아 반도와 무슬림 세계에 개혁의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이 개혁 운동을 따르는 사람들은 스스로 초기 이슬람교의 신념과 강령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여기며 코란과 수나[예언자 마호메트(무함마드)의 전통 율법]의 순수하고 전통적인 가르침으로 복귀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수세기 동안 이슬람의 정통 가르침에 덧붙인 탈선[비다]에서 비롯된 이단적 종교의 정화를 촉구했다. 개혁은 강력한 국가[state]와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통해 아라비아를 통합시켰고, 유목민과 칼리프[특히 과거 이슬람 국가의 통치자를 가리키던 칭호] 시대 이후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평화와 질서를 내세웠다. 이 개혁으로 아라비아 인들의 사회적 관행에 영향을 주었으며, 18세기 이후 활동한 이슬람 개혁가들의 사상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애-디리야의 아-투라이프 지역을 둘러싼 풍경은 이곳에서 20㎞ 떨어진 수도 리야드와 왕국의 급격한 도시화와 발전 등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보존되어 왔다. 아-투라이프는 대추야자의 대규모 농장과 함께 도시 주변에 녹지 공간을 형성해서 원래 농사를 짓던 거주지로서 와디 오아시스의 특성을 잘 보존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의 사막 환경은 지금의 애-디리야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일어난 도시 발전으로부터 보존되어 왔다. 아-투라이프는 1818년에 파괴되어 한 세기 반 동안 버려졌고, 그 후 20세기 중반 무렵 일부 지역에 거주지가 다시 형성되다가 1982년에 완전히 버려졌다. 이는 이 지역의 탁월한 진정성을 보여 준다. 흙으로 된 건축 양식에 어울리지 않는 현대 건축물을 덧붙일 일도 없었고, 원래의 옛 거리를 현대인의 취향에 맞게 개조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