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 2021년 4월 29일 목요일
어디 : 서울 중구 칠패로 5 (서소문 역사공원)
서소문 역사공원을 찾아가는 길은
전철 서울역에서 염천교를 건너면 우측에 조그만 공원으로 걸어서 대략 10분이면 도착한다.
내가 이곳을 찾아간 이유는
천주교 성지에서 불교 현대불교미술전 '공(空·Śūnyatā)'전시가 4월 12일 개막했기 때문인데,
먼저
이곳은 천주교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기에 천주교 성지를 소개한다.
하얀 눈을 뭉쳐 놓은 공 모양으로 '설구화(雪毬花)' , 영명으로 'Snow Ball'이며,
수국, 나무수국, 불두화 등과 구분이 어렵지만 이들 꽃이 아래로 쳐지지만,
설구화는 위를 향해 핀다.
이팝꽃이 활짝 핀 공원에는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순교자 현양 탑은
1984년 한국 순교자 103위의 시성을 기념해 세워진 순교자 현양 탑이 철거되면서 1999년 다시 건립한 것으로,
15m 높이의 주탑과 13m짜리 좌우 대칭 탑 등 3개의 탑으로 이뤄졌으며
세 개의 탑 모두 윗부분 구멍에서 가운데까지 7개의 금빛 선이 흘러내리는데 이 선은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승리와 천주교 7대 성사(聖事)를 상징한다.
기념탑 가운데 새겨진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란 문구가 발길을 잡는다.
노숙자 예수 (Homeless Jesus)
마태복음(25. 34~40)을 묵상하며 제작된 이 작품은 이곳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2013. 청동주조 - 티모시 슈말츠(Timothy P. Schmalz)
조선시대에 소의문(昭義門)이라고도 불리었던 서소문(西小門)은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었던 간문(間門)이었으며,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들어내는 문
즉, 시구문(屍軀門)이기도 하였다.
아현에서 서소문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마포·용산 나루터에 도착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의 물류가 집결되어, 도성으로 반입되는 통로였으며, 도성 내외를 잇는 육로가 교차되어
성저십리(城底十里) 중 가장 번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위치적 특성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는
17세기부터 칠패시장과 서소문시장이 서로 이어지며 번성해 종루가상(鐘樓街上), 이현(梨峴)과 함께
한양의 대표적 시장으로서 상업적 농업·수공업이 성행하였다.
아울러 중국으로 향하는 조선시대의 1번 국도인 의주로(義州路)와 접해 있어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는
한양도성 밖의 대표적인 외교와 상업활동의 중심공간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서소문 밖은 정부 사법기관인 형조·의금부와 가까워 부대시참(不待時斬)①의 집행에 편리하였고,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칠패시장과도 인접하여 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적합한 장소였다.
또한 조선시대 형장은 일반적으로 물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서소문 밖에는 한강의 지류인 만초천이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시대 국가 공식 참형지(斬刑地)가 되었다.
순교자의 칼
조선시대 죄인들의 목에 씌웠던
칼을 형상화하여 중첩 배열함으로써 이 땅에서 죽어간 많은 의로운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자 하였다.
또한 고통 속에서 땅을 뚫고 나와 하늘로 치솟는 작품의 형태는 의로운 이들의 기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 2018년 작가 이경순 -
이에 따라 1784년 가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일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을 당했다. 정조(1776~1800년) 사후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1873년)를 거치는 동안 순교자들은 칼 아래 참혹하게 스러져갔다.
즉,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의 신분제 사회에 맞서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서로 사랑할 존재임을 증거한 순교자의 터가 된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신유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 명례방 회장이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그의 장남 정철상 가롤로, 성호 이익의 제자로 녹암계를 형성한 권철신 암브로시오,
평신도 회장 최창현 요한과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가 순교하였고,
기해박해 때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이자, 정약용의 조카인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누이 정정혜 엘리사벳,
북경을 오가며 성직자 영입 운동에 크게 공헌한 조신철 가롤로, 허계임 막달레나와 그녀의 큰 딸 이정희 바르바라,
둘째 딸 이영희 막달레나,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권희 바르바라, 남명혁 다미아노 등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병인박해에 이르러서는 흥선대원군의 승정원 승지였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초 신학생 중 한 명인 최방제 프란치스코의 형 최형 베드로, 전장운 요한이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쳤다.
이중 이영희 막달레나, 이정희 바르바라, 허계임 막달레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형 베드로 다섯 분의 성인 유해는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 모셔져 있다.
1925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시복식으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가 복자품에 올랐고,
1968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추가로 시복되었다. 이후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재한 시성식에서 이들 103위 복자들은 성인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44명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또 지난 2014년 8월 16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 시복식에 앞서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먼저 찾아 참배하고, 그 이후 열린 시복식에서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123위’를 복자로 선포하였다.
이 중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복자는 27명이다.
따라서 교회사적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단일 장소에서 최다(最多) 성인과 복자를 배출한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1904, 호주의 사진작가 George 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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