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2월 11일
엄동설한 궁녀의 복장을 한 왕과 왕세자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콧속까지 얼어붙는 추위 속에
초라한 궁녀의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고종 순종실록에서는 "이어 아 관"이라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고 부른다.
당시 고종이 피신했던 폭 2m도 안되는 비탈진 좁은 길은 그 당시의 다급하고도 황망했던 상황을 짐작케 하며
세계사에서 단일 왕조로서 최장수 조선왕조는 실질적인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었다.
참고로 사진은 2021년 2월에 담은 것입니다.
고종(高宗)의 길(The path taken by Gojong)
"고종의 길"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이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을 오갈 때 사용한 길로 추정된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미국 공사관 북쪽을 지나 영국 공사관까지 이어졌던 이 길은 1892년 미국 공사에 의해
미국 공사관의 이면도로로 개설되었다.
2011년 미국과 토지교환을 통해 해당 영역이 우리나라 소유가 되었고,
미국 공사관에서 측향 한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1896년 도면과 1900년대 초 촬영한 옛 사진 등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조성하였다.
개방일 - 매주 화요일~ 일요일 (월요일 비공개)
개방시간 - 09:00~18:00 (입장 마감 17:30)
* 동절기(11월~1월)
09:00 ~17:30 (입장마감 17:00)
협조사항 - 이 길은 문화재 구역으로 관련 규정에 따라 반려동물 입장과 자전거 등
운동기구의 소지가 제한됩니다.
문의 - 02-771-9951
덕수궁 후문을 나와
광화문 방향 언덕길 우측은 구세군 건물이고, 좌측 미대사관 돌담이 끝나는 지점에
예전에 없던 "고종의 길"이라는 팻말과 쪽문이 생겨 들어가 보았다.
그 팻말의 문을 들어서면
위의 사진처럼 주변은 비탈진 곳으로 조선 저축은행 중역사택 보수 정비 공사중이다.
아래 사진의 건물이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이다.
조선 저축은행 중역 사택 공사 구간의 비탈길을 오르면
사진처럼 양쪽이 높은 돌담으로 막힌 도로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갔다는 길이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엄동설한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는 여자 복장으로 궁녀용 가마에 타고 폭이 2m 정도인 비탈지고 좁은 돌담길 따라
러시아공사관까지 도망쳐야 했을까?
1896년 2월 11일
한 나라의 임금이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간 피신생활을 하려고 지나갔다가
1897년 2월 20일 다시 환궁했다는 길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친일 개화파 정권이 무너지고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랴오둥[遼東] 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자 1860년대 이후 끊임없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조선 내에도
친러 세력을 부식하려 했던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받아 조선의 왕실 및 일부 정치세력 내에서는
배일 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동안 친일개화파 정권에 의해 눌려 있던 명성황후를 비롯한 척족 세력과 구미 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고 있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때 러시아 공사 K. 베베르[韋貝]는 미국 공사와 함께 명성황후 세력에 접근하여 친러 정책 실시를 권유했다.
이에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20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명성황후를 학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써 일본세력을 만회하고자 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조선 국민의 대일 감정이 극도로 악화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전국이 소란해지자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공사관 보호라는 명목으로 수병(水兵) 백 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이에 친러파인 이범진 등은 베베르와 공모하여 건양 1년(1896) 2월 11일에 국왕의 거처를 궁궐로부터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던 고종 왕과 왕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극비리에 파천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에 일본 제국과 가까워지며,
야마가타 - 로바노프 협정을 맺는다.
또한 러시아 제국은 경원과 경성의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의 채벌권과 같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다.
이에 1897년 2월 18일, 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 고종은 이틀 뒤인
2월 20일에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러시아공사관은
덕수궁과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e)이 설계하여 고종 27년(1890)에 지은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에 주탑이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탑과 지하 2층만이 남아있다가 1973년에 복구되었는데,
이번에 가니 다시 공사중이다.
공사관 주탑 2층에는 창문을 하나만 내었고
3층에는 국면에 2개의 반원 아치형의 창문을 만들었고
지붕은 삼각형 페디먼트(Pediment)로 구성되었다.
학창 시절
광화문에서 서대문으로 나가는 왼편 피어선 학교 뒤편 언덕에 하얀 탑이 보였는데,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세자와 함께 옮겨와
다음 해 2월 20일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還宮)할 때까지 머물렀던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무대이며
역사적 의의가 큰 곳임을 몰랐다.
이곳이 조선 왕조가 사라지는 서곡의 장소라는 것을 알았다면
학창 시절 찾아가 보았을 터인데-----
아쉽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환궁한 그해 10월 12일 새벽 3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한다.
국방력도 외교력도 없는, 지상에서 가장 초라한 대한제국의 탄생이었다.
대한제국은 8년 뒤,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만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에게 아들 순종은 덕수(德壽)라는 궁호를 올린다.
덕수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이다.
덕수궁이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건 이때부터였다.
고종은 1906년 덕수궁의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게 했다.
나라를 빼앗긴 고종 임금은 1919년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눈을 감았다.
함녕전 : 보물 제 820호
고종(高宗)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며,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승하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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