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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연천) 사적 제244호 : 경순왕릉(敬順王陵)의 가을

 

 

언제 : 2020년 10월 6알 화요일

어디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량포리 산 18-2번지

 

 

참 궁금했다.

경기도 포천이나 강원도 철원 여행할 때 지나며 보았던 경순왕릉.

왜 신라 왕이 경주를 벗어나 천 리 타향 임진강변에 묻히게 되었는지 내력이 궁금하여

오래전부터가 보고 싶었던 곳이다.

 

 추석을 지났지만,

코로나 19는 여전히 확진 자시 많이 발생하고 미국 대통령 트럼프까지 확진자가 되어 격리되는 실정이다.

정부에서는 여행이나 사람 만나는 일을 삼가라니

 당일 다녀올 수 있는 늘 궁금했던 경순왕릉을 다녀오기로 했다.

 

08:05

배낭에 카메라와 간단한 점심을 챙겨 집을 나서

전철을 이용하여 문산에서 약 40분 기다려 적성행 버스를 타고 감악산 아래 적성 전통시장에 내리니

11:35

버스 기다리는 분들에게 고량포구 가는 버스를 물으니

배차 간격이 3시간이라며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르니 택시를 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란다.

다시 나올 때 버스를 못 타면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시간을 벌기 위해 택시를 탔다.

 

11:55

경순왕릉 입구인 고량포구에 도착했다.

택시 요금은 정확히 10,000원

택시 기사분이 자기가 경순왕 후손이라며 교통도 불편한데 이곳을 오시는 것은 후손이냐고 물어

후손은 아니고 신라왕이 왜 이곳에 묻히셨는지 궁금해서 왔다니

참 대단하시단다.

 

 

공항철도 마곡대교 건너며 바라본 한강 - 좌측은 난지도 하늘공원 우측 멀리 여의도 고층

 

 

 

문산역

 

 

파주시 적성면 - 감악산

 

 

장남교에서 본 임진강

 

 

파주시와 연천군을 잇는 장남교

 

 

 

 

 

 

장남대교를 건너니 개성 25km - 서울은 46km라네

 

 

 

 

 

 

고량포 역사박물관 - 코로나 19로 임시 패쇄

 

고량포 역사박물관이며 경순왕릉 입구인 고량 포구가 대중교통 버스의 종점이다.

승용차와 택시는 경순왕릉 입구 주차장까지 간다.

 

 

 

 

 

 

경순왕릉 주차장과 경순왕릉 입구

 

 

 

 

경순왕은 제56대 신라의 마지막 왕(927~935년 재위)으로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문성왕의 후손으로 927년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이 왕위에 올를 당시에는 국가가 후백제, 고려, 신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후백제의 잦은 침입과 각 지방 호족들의 활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다.

이에 민심도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하들과 큰아들 일(鎰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후 태자 일은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麻衣)를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 보냈다고 하여

후일 일명 마의태자라고 불린다.

 

고려에 나라를 귀부한 경순왕은 태자보다 높은 지위인 정승 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 궁을 하사 받고

경주를 식읍(食邑)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되었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귀부 한 지 43년 후인 978년(경종 3년) 세상을 떠났다. 

신라 유민들이 경주에 장례를 모시고자 했으나 저 정에서 "왕의 구(柩) 개경의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여

이 곳 장단부 고량포리 성거산에 왕의 예로 장례를 모셨다.

 

 

 

 

 

경순왕릉 앞 비석의 탁본

 

 

 

 

 

 

경순왕릉 전경 -좌측에 비각과 제각이 있다.

 

신라 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마의태자와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무덤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봉토 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이 아닌 경기도에 있다.

 

 

 

앞에 탁본이 무덤 앞에 서 있는 비석의 탁본이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고량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 쪽에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다.

경순왕의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잊여졌던 것을

1747(영조 23년) 후손들이 왕릉 주변에서 묘지석은 발견하여 되찾았다.

따라서 경순왕릉은 조선 후기의 양식으로 재정비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례가 행해진다.

 

 

비각

경순왕릉 추정 비각

경순왕을 주변에는 경순왕릉 추정 신도비라고 전해지는 대리 석재의 비석이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 고랑포구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것으로 1976년  고랑포 초등학교로 옮겨 놓았다가

후손들이 1748년(영조 24년) 신도비로 추정하여 1986년 비각을 짓고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비의 마모상태가 심하여 현재 한쪽 면에서만 몇 개의 문자가 판독될 정도여서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다.

비석의 건립 연대는 모르지만 비석의 형태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비각 안에 신도비를 자세히 보면

얼굴 형상이 나타나고 한자가 10자 정도 보인다는 누군가 메모를 붙여 놓아 참고로 적어봅니다.

 

 

 

 

 

 

와서 보았으면 또 떠나야 한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지만, 임진강변 너른 연천 들에는 노랗게 벼가 익어가고, 인삼밭의 인삼들이

건강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정말 쉽지 않게 찾아왔다.

경순왕릉은 경주 신라 왕릉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강화도의 고종 홍릉을 비롯한 4개의 왕릉에 비하면 너른 터에 강화도 왕릉보다 더 왕릉스러웠다.

 

어슴프리 알고 있었던 신라의 멸망과 경순왕릉에 대해 더 자세히 공부할 수 있어 마음 후련하나

고려에 귀속을 절대 반대하며  항거했던 아참 벼슬의 나의 선조 기계유 씨는

고려의 미움을 받은 어려움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걸어서 고랑포구로 나와

코스모스 핀 임진강변의 정자에서 점심을 들고, 2km 거리에 있는 호로고루성을 향해

가을 들길을 걷는다.

 

경순왕릉에서 나오다 본 임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