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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귀천(歸天) 시인 천상병과 봄꽃


귀천(歸天)의 시인 천상병과 봄꽃





가까운 산 둘레길을 걸으며

나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 이 좋아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큰소리를 내어 읊곤 했는데,

오늘

당고개역에서 학림사와 도솔봉을 거쳐 정상에 선 다음

하산할 때

수락산역으로 내려오니 산에 올랐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춘다.


2009년 4월

 서울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입구에 '시인 천상병 공원'이 생겨 뜻하지 않게 천상병 시인의 시들을

읽으며 힐링할 수 있었다.




















귀천정(歸天亭)



천상병(千祥炳, 1930 ~ 1993)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문단의 마지막 기인'으로 불리며

 〈귀천〉과 같이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났으나 해방되던 해 가족을 따라 귀국하여 마산중학을 나왔고,

1954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수료했다.


1952년 “문예”에 ‘강물’, ‘갈매기’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가난, 무직, 방탕, 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시집으로

“새”(1971), “주막에서”(1979),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등이 있다.

천상병은 주벽이나 괴이한 행동으로 우리 시사(詩史)에서 매우 이단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시인이라는 세속적 명예와 이익을 떨쳐 버리고 온몸으로 자신의 시를 지킨,

진정한 의미의 순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가난이 내 직업’이라고 썼을 정도로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

따라서 그의 초기 시에서부터 말기 시까지

끊임없이 가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 수밖에 없던 그에게 가난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어쩌면 운명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가난에 대해서 소리쳐 주장하거나 항거하지 않고, 달관된 태도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

이 시인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이처럼 맑고 투명한 시 정신을 유지하면서

삶에 대한 무욕(無慾)과 무사심(無私心)을 보여 주는 특징이 있다.


천상병은 살아 있는 동안 유고 시집을 낸 것으로 유명하다.

1967년 천상병은

이른바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간첩 혐의로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르며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무혐의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는 고문의 후유증과 지나친 음주 생활에서 오는 영양 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행려 병자로 서울 시립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의 행방을 찾지 못한 그의 친척들과 문우들은 그가 사망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1971년 유고 시집 "새"를 발간하게 된 것이다.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