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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강화) 사적 제227호 : 광성보(廣城堡)와 신미양요(辛未洋擾)

 

사적 제227호 : 광성보(廣城堡)와 신미양요(辛未洋擾)

 

 

 

 

언제 : 2020년 3월 15일 일요일

어디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온면 덕성리

 

 

화두돈대와 강화 전성을 뒤로하고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광성보를 향해 걸어 도착하니

주차장에 차들이 없다.

 

평상시 같으면 주차를 하지 못해 돌아가던 차도 있더만, 코로나19의 여파로

 사람들이 조심하고 있다는 증거다.

 

 

두 개의 철탑을 지나 3개의 낮으막한 맨 끝 산에 광성보가 위치한다.

 

 

출발한 화도돈대가 까마득하다.

 

 

철탑 두 개

 

 

광성보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차가 없다.

 

 

광성보 안내도

 

 

광성보 안조루

 

 

 

 

좌에서 불랑기 - 소포 - 대포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와 쌍충비 가는 길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 후 성책과 문루가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그리고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모두 보수 정화되었으며,

이 때 세운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쌍충비(雙忠碑)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로 비의 규모는 폭 62cm, 높이 168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했고,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 순절비인데 폭 58cm,높이 177cm, 두께 26.5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 건립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무명용사 51인의 묘

 

 

분명

무명용사들은 천민이거나 서민이었을 것이다.

시절

그들에게도 조국이 있었을까? 만일 있었다면 누구를 위한 조국이었을까?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장군들은 전쟁에 패배해도 죽지 않았고, 전쟁에 승리했다면 그들은 많은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목숨을 바친 군졸들은 군주를 위해 말없이 죽어갔다.

 

한반도에서 지금까지 침략을 당한 전쟁과 승리를 했다는 임진왜란 역시 수많은 군졸들이 죽었으나

장군들은 영웅을 만들어 사당을 짓고 아직도 제사를 지내는데,

정작

말없이 죽어간 그들에겐 무엇이 남았는가?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 비

 

 

신미양요 발발 원인

 

1866년은 조선의 대외교섭사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그 해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정책(禁壓政策)에 따라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죽이는,

이른바 병인사옥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배외 감정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제너럴 셔먼호

길이 55m, 774톤짜리 증기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애초 용도는 군함.

1861년 건조되어

영국과 미국 해군이 '프린세스 로열'이라는 이름으로 각각 2년씩 사용한 후 민간에 불하한 선박이다.

최고 속도 11노트로 당시에는 가장 빨랐다.

 

1866년(고종 3) 6월 18일

미국상인 프레스턴이 조선과의 교역을 위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중국 톈진[天津]에서 출발했다.
제너럴 셔먼호에는 대포 2문이 장착되어 있었으며,

완전무장한 승무원 19명과 통역자인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가 타고 있었다.
7월 7일 대동강 하류에 도착

강을 거슬러 올라가 황해도 황주목 삼전면 송산리 앞에 정박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대원군 정권하에 철저한 쇄국정책을 견지하고 있던 터라

외국과의 교역 및 기독교 포교는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이에 황주목사 정대식, 역관 이용숙(李容肅) 등이

프레스턴 일행에게 돌아가라고 했으나,

제너럴 셔먼호는 7월 13일 평양부 신장포까지 올라갔다.


이에 평안도관찰사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로 중군 이현익(李玄益)과 서윤 신태정을 파견하여 즉시 퇴거할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프레스턴 일당은 물러가지 않았고, 야간에는 상륙하여 약탈까지 자행했다.

그리고 폭우로 수위가 높아진 대동강 상류까지 나아가 16일 만경대 부근에 정박했다

 

그들을 막기 위해 배에 접근했던

이현익·박치영·유순원이 붙잡혔고, 조선측은 석방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너럴셔먼호가 교섭 차 방문한 조선 관리를 억류한 채 석방 조건으로 쌀 1,000섬과 금·은, 인삼을 요구하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는 무력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장마로 불어났던 강물이 빠져 배가 모래톱에 걸린 상황.

평양 관민은 24일 조각배를 이용한 화공으로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다.
권총과 칼을 차고 복음을 전하겠다던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와 덴마크인 선장을 포함, 선원 23명 전원이 죽었다.

조선인도 5명이 죽고 7명이 다쳤다.

이 일을 빌미로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Daum백과]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6월 1일 ~ 1871년 6월 11일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의 전쟁.

 

1871년,

 미국은 전통적인 포함 외교에 의해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마침내 조선 원정을 결정하였다.
주청미국공사 로우(Low, F. F.)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J.)에게 해군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하여 군함 5척에,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였다.
5월 초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함대를 집결,

약 보름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고 5월 16일(음력 3월 27일) 조선원정 길에 올랐다.
로저스는 조선측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에는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으로 강제적으로 입약(立約)을
성취시키겠다는 포함 책략을 수립하고 인천 앞바다에 내침하였다.

로저스는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조선대표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6월 2일(음력 4월 15일)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 대표는 조선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만약 이 같은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 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이 동원되었다.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미군은 6월 11일(음력 4월24일)에는 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성보(廣城堡) 작전을 수행하였다.

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광성보전투에서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으나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선군 전사자는 57명으로 되어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했다.

조선측은 조·미전쟁에서 완전 패전하였지만, 미군 함대의 철수를 곧 패퇴로 간주하였다.

 

이 전투 후 성책과 문루가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그리고 어재연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모두 보수 정화되었으며,

이 때 세운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6월 11일) 때 전멸 당한 손돌목 돈대와 조선군 시체들

 

신미양요 동안 조선군과 미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은 광성보였다.

특히

손돌목 돈대는 조선군 사령관이 중군 어재연 장군이 직접 지휘하며 격렬하게 반격을 가하던 요새로

미군 측에서는 맥키(Hogh Mckee) 해군 중위와 두 명의 수병이 전사하고,

조선측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전사한 곳이다.

사진의 흰옷 차람의 조선군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 없다.

 

 

 

신미양요 그 이후

미국이 물러가긴 했지만 조선군 전멸이라는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는 통상 거부 정책의 한계성을 재인식했고,

위정 척사파는 위정 척사파대로 흥선군의 개혁 정치 및 남인 등용으로는 양이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단기적으로 신미양요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내적으로 쌓이는 반발과 불안감을

막을 수는 없어 불과 2년 뒤, 대원군은 최익현의 탄핵으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한다.

 

집권한 고종은 개국,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고,

신미양요가 일어난 지 불과 4년 뒤, 일본이 미국을 흉내내어 운요호를 보내자,

1876년 2월 27일

강화도에서 별다른 충돌 없이 일본과 조약을 맺었는데,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고 개국해버린다.

 

이것이 바로 일제강점기의 신호탄이었다.

 

 

손돌목 돈대(孫乭목 墩臺)

 

손돌목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돈대로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778㎡에 성곽 길이는 108m이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미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원래는 돈대가 아니라 손돌목 돈대에 속한 외곽 초소겸 포대였다.

용두돈대

 

 

 

 

손돌목

손돌목과 용두돈대

손돌의 묘

 

 

 

 

 

손돌목과 광성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