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226호 : 강화 덕진진(江華 德津鎭)과 병인양요(丙寅洋擾)
언제 : 2019년 2월 4일 월요일
어디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로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졌으며, 12진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는
덕진진이다.
현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부대가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퇴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치열한 포격전 끝에 미국함대를 격퇴시켰으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때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門樓址)만 남게 되었다.
1976년 돈대와 성곽을 보수하면서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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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 공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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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 공조루와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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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 공조루와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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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선비 화남 고재형(1846~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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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 맞은편에는 김포 덕포진과 손돌의 묘가 조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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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하의 손돌목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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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 남장포대
대포 10문이 배치된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신미양요 때 미국 아세아함대를 향해 김포 덕포진 포대와 함께 맹렬한 포격전을 전개했던 곳으로,
신미양요 때 완전히 파괴되어 다시 복원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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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포대 10문의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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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돈대에서 내려다 본 남장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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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당시 미군에게 점령당한 덕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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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때 덕진진을 점령한 후 바다를 지키는 미국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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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를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이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과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다.
문수산성에서는 한성근(韓聖根) 부대,
정족산성에서는 양헌수(梁憲洙) 부대가 수적 열세에도 총격전 끝에 프랑스를 물리쳤다.
두 곳의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70여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조선군의 거센 저항에 기세가 꺾인 프랑스 군은
마침내 함대를 이끌고 40여 일 만에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군은 강화도 일대에 대해 약탈과 방화를 저질러 행궁과 사당, 외규장각 등을
불태웠으며, 20만 프랑 상당의 금은보화,
조선 시대 의궤(儀軌) 300여 권 이상과 군기물자 등을 빼앗아 갔다.
또 민가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불에 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병인양요는 이로써 마무리 됐다.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일로 자신감을 가진 대원군은
기존에 고수하고 있었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병인양요는 두 달 만에 끝났지만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귀중도서와 은괴 19상자 등을 약탈당했다고 한다.
또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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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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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자기 집에 타인이 말도 없이 침입하여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면
당연히
쫓아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는 곳이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면
이웃과 친교를 맺어 잘 사는 것이 옳다.
조선만 쇄국정책을 쓴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세계열강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웠으나,
조선은
세도정치로 국력보다 사리사욕에 눈 멀어 외국과 화친을 맺을 능력도 없었고, 지배층은 중국에 의지하며
더 드센 쇄국정책을 펼친다.
이 시기에라도
외국에 청년들을 유학 보내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발전된 문명을 배웠다면 어느 정도 불평등 조약이
맺어졌을지라도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
즉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과 곰과 여우 같은 러시아와 일본의 틈새에서 자력으로 서지 못하고
강대국의 눈치를 보는 지금의 우리의 현실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매우 우려스럽다.
이 우려를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국민의 눈과 입과 힘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위정자들이 국민의 눈을 가리고 자기들의 뱃속을 채우는 위법을 해도 다시 뽑아 주는
어리석은 과오를 되풀이 해선 안된다.
나라를 살리는 일은 바로 국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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