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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강화) 덕진진 가는 길의 풍경과 사유(思惟)

 

덕진진 가는 길의 풍경과 사유(思惟)

 

 

 

 

언제 : 2019년 2월 4일 월요일 

어디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초지진을 출발

강화나들길의 제 2코스인 호국돈대길 약 3.1km 걸으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격전지였던

덕진진에 도착한다.

 

그러나

가는 길에 염하의 아름다운 풍경이 걸음을 더디게 한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강화에서 가장 큰 덕진진 남장포대와 건너 김포 덕포진 두 곳에서 염하에 있는 외국 군함을 향해

얼마나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곳인가!

 

신미양요 때

염하를 통해 덕진진을 점령하지 못한 미국 군함이 초지진으로 상륙하여 초지진을 파괴하고

덕진진에서 칼과 활을 가진 나약한 민초들을 총과 포로 무장한 미군들에게

육탄전을 벌인 모습을 상상하니

걸음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초지진을 출발 염하 따라 가는 길의 멋진 커피숖

 

 

커피 숖에서 본 풍경

 

 

염하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수로의 끝 지점인 김포 문수산성이 아스라이 조망된다.

 

 

 

 

 

 

 

 

 

 

 

 

 

 

덕진진 가는 길에 본 김포 덕포진 포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염하를 통해 들어오는 프랑스 군함과 미국 군함을 향해 김포 덕포진 포대와 강화 덕진진 남장포대에

양쪽에서 동시에 수백 발의 포탄이 적군함과 염하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를 점하더라도 살상무기는 겨우 창과 칼 그리고 활로

총으로 무장한 그들을 제압한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김포 덕포진에서 본 강화 덕진진

김포 덕포진 '가' 포대에서 본 맞은편 강화도 덕진진

 

 

 

 

갈대

 

 

섣달

그믐날

갈 곳 없다

 

누구는

고향

가고

 

누구는

연인

만나러 갔다는데

 

머리 허옇도록 어찌 살았기에

두 눈

꿈벅거리며

 

올 리 없는

누군가

움직이지 않고 기다린다

 

누군가

어디선가

웃으며 맞아줄 갈 곳 있다면

 

지는

갯뻘에서 두 발 빼어

 

강물에

씻고

바람에 말리어

 

이따금

머물다가는

갈매기에게 냄새 좋은 화장품 빌려

 

얼굴

 

굳어 목석같은 가냘픈 삭신이라도

고루

발라

 

좋은

냄새

풍기고 싶은데

 

오늘

섣달 그믐날도

갈 곳 없어

 

지는 해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덕진진 가는 길의 풍경

덕진진에는 덕진돈대, 용두돈대 그리고 남장포대와 덕진포대를 거느린 강화해협/염하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이며

강화 12진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다.

 

 

덕진진 가는 길에 돌아 본 초지대교

 

가는 곳이 가까우면 떠나왔던 곳은 더욱 아슬하다

 

 

덕진돈대 앞 갯골

30 여m 갯골을 건널 수 없어 멀리 갯골 물막이 다리를 건너 다시 덕진돈대로 가야 한다.

 

 

바닷물이 농지로 유입되지 않도록 막은 물막이

긴 갯골을 걸어 저곳에서 갯골을 건너 다시 반대편 갯골을 따라 염하로 나간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강화 농수로

강화 농수로

장마철에는 갯골로 물을 흘러 보내고

밀물 때는 물막이를 막아 농수로에 바닷물이 유입되지 않도록 한다.

 

 

들 너머 멀리 초지 대교가 조망된다.

 

 

덕진돈대 가는 길의 농장

 

갯골 풍경

갯골 풍경

 

갯골 풍경

 ▼ 

 

병자호란 뒤

강화도의 중요성을 알고 방비책을 강구하여
내성(內城)·외성(外城)·진·보·돈대 등을 축조하였는데, 12진보는 그 중의 하나로 강화도 주위에 설치되었다.

 

12진보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의 방어 시설을 확충하면서

5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등 모두 12개의 진보를 설치하였다.

 '진'은 '보' 보다의 규모가 다소 큰 부대였다.

각 진보에는 규모에 따라 첨사(종3품), 만호(종4품), 별장(종9품)이 지휘자로 파견되어 부대를 통솔하였다.

 

5진은

월곶진(첨사), 제물진(만호), 용진진(만호), 덕진진(만호), 초지진(만호) 이고,
7보는

인화보(만호), 승천보(별장), 철곶보(별장), 정포보(별장), 장곶보(별장), 선두보(별장),

광성보(별장) 이며,
12개의 진.보는 각각 3-5개의 돈대를 관할하고 있었다.

 

돈대는 진과 보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관측과 방어를 담당하는 초소규모의 군사시설이다.

 

 

1866년은 조선의 대외교섭사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그 해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정책(禁壓政策)에 따라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죽이는,

이른바 병인박해(丙寅迫害)를 감행했다.

 

 

병인박해(丙寅迫害)- 병인사옥(丙寅邪獄)

 

1866년(고종 3) 정월(음력 1월)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이로써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동안에 국내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산속으로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림에 쓰러지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으며,

이 통에 신도도 아닌 자들이 박해당한 예도 허다하였다.

 

그러자

1866년 10월 26일 프랑스 로즈 제독이 군함 3척과 함께

 1866년(고종 3년) 정월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1866년 음력 1월)를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명분으로 한성부 근교까지 진출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 10월 26일 (음력 9월 18일)

로즈 제독이 인솔하는 프랑스 군함 3척이 한성부 근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 일대에 진출했다.

이로 인해 서울 도성은

공포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급히 어영대장 이용희를 파견하여

한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였다.

 

프랑스 함대에서는 3척의 소(小)함대로써 도성의 공격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11월 2일 청나라로 물러났다.

 

 

1865년 일본 나가사키 항 주변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로 중앙의 큰 배가 기함인

순양함 게리에르(Guerriere)이다.

 


그 해 11월 17일 로즈 제독은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7척의 군함과 일본의 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300명을

포함한,  도합 1230여 명 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다시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勿淄島_작약도) 근처로 진출하였다.

 

11월 20일에는

프랑스 함정 4척과 해병대의 일부가

강화도의 갑곶진(甲串鎭) 부근의 고지를 점령한 뒤 한강의 수로를 봉쇄했다.

이어 11월 22일에는 프랑스군의 전군이 동원되어 강화성을 공략해 점령하고 여러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12월 13일 프랑스군은 다시 교동부(喬桐府)의 경기수영(京畿水營)을 포격하고,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앞서 강화부를 점령한 160여 명의 프랑스 해병이 정족산성의 공략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매복 중이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 및 사격에 능한 500여 명의 조선군 포수들의 공격을 받아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으면서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로즈 제독은 조선 침공의 무모함과 더 이상의 교전이 불리함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했다.

 

12월 17일(음 11월 11일)

프랑스 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官衙)에 불을 지르고 약탈한 금은괴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갑곶진을 거쳐 청나라로 철군했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격퇴했던 덕진진도,

1871년 신미양요 때는 치열한 포격전 끝에 미국함대를 격퇴시켰으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때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門樓址)만 남게 되었다.
1

976년 돈대와 성곽 그리고 남장포대를 보수하였으며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 Daum백과 덕진진-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게 점령당한 덕진진

 

 

 

 

마침내

초지진을 출발하여 덕진진 덕진돈대에 도착했다.

 

현재

강화해협/염하에는 썰물로

바다 밑바닥의 일부가 드러나 수로의 상태를 알 수 있는데,

덕진진 앞에도

초지진 앞처럼

암반과 바위들이 방어를 하고 있어 배로 이곳에 닿기는 어려울 것이며

지리적으로도 갯펄이 해안에 있어 진지로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