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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강화) 사적 제225호 : 초지진(草芝鎭)과 포탄 맞은 소나무

 

사적 제225호 : 초지진(草芝鎭)과 포탄 맞은 소나무

 

 

 

 

언제 : 2019년 2월 4일 월요일

어디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섣달 그믐날

누구에게나 섣달 그믐날에 대한 아련한 추억 하나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본 그 순간

저절로 눈가가 젖든지 아니면 저절로 미소가 일든지.

 

해마다 아버님 기일을 지낸 후

편두통이 일거나 몸살을 앓아 힘들었는데, 올해도 변함없이

이틀 동안 몸살과 체증으로 자리에 누워있다가 내일이 설날인데 더 누워 있으면 내일도 못 일어날 것 같아

아내가 밤새 조리한 수정과를 보온병에 담고 집을 나섰다.

 

원래 2월 2일 토요일

지인과 기해년 설날 맞아 강화나들길 두 번째 코스인 호국돈대길을 다녀오기로 했는데

뜬금없는 몸살과 체증으로 약속을 취소하고

입춘이면서 섣달 그믐날인 오늘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나 바람 쐬고 천천히 걸으면 내일은 좋아질 것을 믿고

외세에 대항한 역사의 현장인 초지진에 도착했다.

 

 

초지대교 위에서 염하를 바라보며

 

 

 

 

 

 

파일:초지진.jpg

위키백과에서 모셔온 초지진 풍경

 

 

초지진 풍경

 

 

강화초지대교(江華草芝大橋)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연결하는 다리로

 2002년 8월 28일에 개통되었다.

 

 

초지진 건너 김포 대명포구

 

 

초지진 앞바다

 초지진 부근 물이 빠지니 암초들이 늘어져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는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운양호 침공 때

그들은 이미 이곳 수로를 아는 사람을 고용했거나 미리 측정하여 알았던 모양이다. 

 

 

 

 

 

 

 

 

포탄에 맞은 흔적

 

 

 

 

위 사진의 포탄 맞은 자리를 확대한 사진

 

 

외세의 침공에 상처만 남은 초지진에는

두 그루 소나무가 부부처럼, 연인처럼 마주 보며 척박한 성벽이지만 보기 좋게 나란히 서

수백 년을 끈끈하게 살아오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의든 타의든 상처를 입게 된다.

그 상처를 어루만지며

지독한 삶을 견디고 혹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 도태되기도 한다.

 

1871년이면 대략 150년 전

이 두 그루 소나무는 어느 정도의 소나무였기에 가지에 포탄을 맞고도 늠름하게 살아 오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나라에 힘이 없으면

가난하고 불쌍한 국민이 외세에 얻어 터지고, 짓밟히며, 피를 흘리고,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은 국민을 속이고 도망을 간다.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 일대는

조선 효종 7년(1656)에 강화도와 강화해협의 수로 방비를 위해 구축한 요새인 초지진(草芝鎭)이 있던 곳이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이후 허물어져 돈대(墩臺)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 강화전적지 보수정비사업 때 초지돈대만 복원되었다.

현재의 초지진은 원래 안산(安山)의 초지량(草芝梁)에 있던 조선 수군의 만호영(萬戶營)을

현종 7년(1666)에 강화로 옮겨 강화수로 수비의 요새로 새롭게 구축한 것으로,

 초지진에는 군관 11인, 사병 98인, 돈군 (墩軍) 18인, 목자(牧子) 210명 등이 배속되어 강화해협을 수비하였다.

 

또한 초지돈(草芝墩), 장자평돈(長子坪墩), 섬암돈(蟾巖墩) 등 세 곳의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 돈대와 본진간의 협공체제를 통해 수비력을 극대화 하였다.

초지진에는 군선(軍船) 3척이 배속되어 있었고, 부속된 3곳의 돈대에는 각각 3개의 포좌(砲座)를 마련하고

화포를 설치하여 강화 해협을 수비하였다.

 

1866년 10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 극동함대, 1871년 4월 신미양요 때 미국 아세아함대,

1875년 8월 일본 군함 운양호의 침공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이다.

 

특히

고종 8년(1871)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군함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 등의 포격과 미국 해병 450명의 상륙공격으로 초지진이 미군에 점령 되면서

군기고(軍器庫), 화약고, 진사(鎭舍) 등이 모두 파괴되었다.

고종 12년(1875)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의 포격으로 또다시 초지진이 큰 피해 를 입었는데,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외세에 문호가 개방된 이후 방치되어 허물어지고 말았다.

 

현재 초지진의 진사와 주요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음식점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서 축조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초지돈대는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 m 되는 타원형의 돈대인데,

내부에는 3군데의 포좌(包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으며,

조선시대 대포 1문이 전시되어 있다.

 

 

 

 

 

 

 

 

 

 

홍이포(紅夷砲)

네덜란드에서 중국 청나라를 거쳐 유래된 대포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홍이포라고 이름이 지어졌다.

홍이포를 홍이대포(紅夷大砲)라고 부르며,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다.

또는 '컬버린포' 라고도 한다.

 

길이 215cm, 중량 1.8t, 구경 12cm, 최대사정거리2~5km 유효사정거리 700m 인 전장포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요호 사건 때 사용되었다.

▲ 

 

 

포탄은 날아갔으나

포탄이 터지지 않는다는 것은 돌을 던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 대포를 가지고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일본과 싸웠으니 그 결과는 참담할 뿐이다.

 

 

초지포구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흐르는 물길을 염하라고 하며,

사진의 초지대교 아래에서부터 김포 문수산성까지의 수로가 염하이다.

초지진에서 바라본 덕진진

 

 

초지포구

 

초지진을 떠나 덕진진을 향하며

조선 말 외세들이 중국을 통해 한양으로 가는 뱃길은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가야 하는데 첫 머리가 초지진이었기에 이곳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보여주는 곳은 초지진이 아니라 초지진의 일부인 초지돈대이다.

관계기관에서는 고증을 통한 초지진을 그림으로나마 초지진의 규모와 초지 포대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어 아쉽고,

그런 설명 없이 돈대만 있으니 진과 보와 돈대를 혼동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전쟁에서 죽거나 부상을 입어 평생 서럽게 살았던 사람은

힘 없고 돈 없는 민초들이었다는 것.

 

오늘

우리나라의 정세와 강대국에 의한 조건들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볼 때,

자력강국이 되지 않으면

오늘의 우방국도 내일은 적국이 될 수 있음은 최근 일본의 여러 행태를 보면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