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 천등산 봉정사 극락전
언제 2017년 12월 24일 일요일
어디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태장리)
독서실 일을 하니 월요일이 휴무일이다.
비 내리고
오전 근무를 마치고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는데, 오늘 중부지방은 비 그치고 내일은 날씨가 좋다네.
13:00
인천 출발 도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과 커피를 마시고
16:30
오늘의 목적지 천등산 봉정사에 도착하였다.
성탄절 여행 코스로는
당연히 성당이나 교회를 방문해야 했으나 안동 봉정사를 방문하는 이유는
첫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었던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봉정사 극락전이 먼저 건축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봉정사 극락전 기둥을 직접 가서 만져 보고 싶었고,
두 번째는 1999년 4월 21일,
당시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하면서 조그만 절인 봉정사를 방문하셨는데,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왜 이곳을 방문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안동에 도착하니 비가 그쳐가는데, 오늘은 구름 걷히지 않고 날이 저물 모양이다.
16:30
봉정사에 도착하니 입장료 2,000원이지만, 만65세 이상은 그냥 입장할 수 있었다.
봉정사 들어가는 길은 조금 가파른 길이었으나 울창한 송림 사이를 걷는 기분은
비가 금방 그쳤기 때문인지 더욱 싱그럽다.
봉정사 일주문
바닥에 아직 빗물이 고여 물기가 많다.
△
일주문 현판
천등산 봉정사
산속의 해는 일찍 지는데 비까지 내린 날은 더 하다.
일주문을 경계로
솔숲은 사라지고 잡목들의 시커먼 삭신과 여태 남은 빛바랜 잎들이 물기를 머금고 앙상한 가지 아래
어둠이 내리고 있다.
1. 극락전 2. 대웅전 3. 화엄강당 4. 고금당 5. 삼층석탑 6. 무량해회
7. 만세루 8. 협문 9. 종각 10. 삼성각 11. 영산암 12. 지조암
봉정사는 지금까지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이 있다.
특히, 고려태조와 공민왕께서 다녀가기도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평소와 같으면 아직 어두울 시간은 아닌데,
하필 비가 내려 어둠은 일찍 내리고 있는 봉정사 들어가는 길이 크게 S 형태를 이루어 인상적이다.
△
봉정사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보호수 소나무
수령 : 180년
수고 : 1.5m(?)
나무둘레 : 70cm
△
봉정사 올라가는 길
선대부터 돌계단을 올랐으면 스님들도 계단 걸음이 마땅한데, 그들은 승용차로 이동하니
참으로 우습다.
대체로 절을 들어가려면
일주문을 거쳐 사천왕문 그리고 그 절에 맞는 해탈문이니 혹은 어떤 의미의 문을 지나 대웅전에 닿더만,
봉정사는 사천왕문은 없고 구불대는 자연스런 기둥 6개가 받친 만세루 밑을 지나
대웅전에 닿는다.
만세루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
이 건물은 대웅전 앞에 있는 2층의 누각형태를 한 건물로 사찰의 입구에 해당되며 1680년(숙종 6)에 건립되었다.
건립 후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으며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형의 경사를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앞면은 2층이나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하였으며,
17세기 후반의 당당한 건축수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
△
▽
사바세계를 떠나 온갖 번뇌와 망상을 벗어버리고
오직 부처님 세계로 가는 길이 바로 이 공간을 지나는 것이다.
만세루 하부를 지나 거친 돌계단을 오르면 내부 중심공간인 대웅전을 만나게 된다.
△
봉정사 대웅전 = 국보 제311호
이 건물은 봉정사의 중심 건물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이다.
건물 앞에는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윗면에는 좁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세웠으며 내부도 마루를 깔았다.
중앙 뒷면에 높은 기둥 2개를 세워 그것에 의지해 불단을 만들었다.
내부의 단청은 건립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건물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2000년에 해체. 보수 하였다.
▽
석탑이나 석등의 치장이 없는 대웅전 앞
정말 잘 생겼다.
어찌 된 영문인지 두 손을 모아 마음으로나마 감사의 기도도 올릴 여유도 없이 날이 어두울까 서둘렀다.
그러나
너른 어깨와 탄탄한 하체가 어우러진 참 멋진 대웅전으로, 다른 절 대웅전에 비교해 대웅전
앞에 마루가 있어 특별하다.
△
아미타설법도 = 보물 제 1614호
봉정사 대웅전에서는 현존하는 국내최고의 후불벽화 (後佛壁畵 : 불상뒤 벽체에 그린 그림)인
'미륵하생도(微勒下生圖)'가 발견 되었다.
봉정사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던 중 지붕아래 종보받침에서
'1428년(조선 세종 10년)에 미륵하생도를 그렸다' 와 '1435년(세종17년)에 대웅전을 중창했다.'는
내용이 적힌 묵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1476년(조선성종7년)에 조성된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의 후불벽화보다
최소한 40-50년정도 앞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가로 387.5cm, 세로 380cm 크기의 봉정사 후불벽화는 고려불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본존 왼쪽상의의 금구장식과 왼쪽 팔꿈치의 Ω모양의 옷주름, 대의에 세필로 그린 그림의 세련된 둥근 꽃무늬와
옷깃의 보상당초무늬 등 고려시대 불화의 대표적인 특징이 선명하게 간직된
국보급 벽화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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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서 본 대웅전
△
화엄강당 = 보물 제448호
승려들이 공부하는 장소이다. 강당 건물로는 보기 드물게 온돌방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남쪽에 2칸 부엌, 북쪽에 4칸 온돌방이 있으나 원래는 정면 4칸, 츨면 4칸으로
현재의 온돌방 뒤쪽으로 4칸의 마루가 있었다.
강당으로 사용한 건물이므로, 불당에 비해 낮은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측면의 중앙에 사각기둥 1개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도록 하였으며, 그 사이에 창을 내었다.
베게를 보면 원형의 형태에 옆면 베겟모를 보면 대개 사각형태가 많음은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
화엄강당 기둥 양쪽 끝은 원형이고 가운데 기둥은 사각기둥으로 원형 기둥은 하늘을 상징하고
사각기둥은 땅을 상징하는 자연과 함께 하는 문화이다.
△
무량해회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집에 전면과 남쪽에 마루를 놓고 양쪽의 중앙에 칸벽을 설치하여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요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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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 고금당 - 중앙 : 극락전 - 우측 : 화엄강당
극락전 = 국보 제15호
이 건물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1972년에 실시한 보수공사 때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건립 후 첫 수리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이며, 그 후 조선 인조 3년(1625) 2차에 걸친 수리가 있었다.
원래는 대장전이라 불렸으나, 뒤에 극락전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기둥의 배흘림, 공포의 단조로운 짜임새, 내부가구의 고격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돌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배열했으며, 전면과 후면 중앙칸에 판문을 달았고 양쪽에는 살창을 달았는데,
전면의 판문과 살창은 수리할 때 복원된 것이다.
불당의 중앙 뒤쪽에 2개의 기둥을 세워 불단 벽을 만들고 그 안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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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를 보지 못해 다른 곳에서 모셔온 극락전 아미타부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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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측면
내가 극락전을 본 느낌은 아주 간결하고 단아한 느낌의 건축물이다.
▽
극락전 내부를 보고 싶었는데 너무 늦어 내부는 볼 수 없었고,
이렇게 의미 있는 사찰에 관광객이 없다는 것도 또한 아쉬운 일이다.
성탄절 전야라서일까?
△
3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
봉정사의 극락전 앞에 있는 이 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 3.18m이다.
탑의 무게로 인하여 기단부의 일부가 약간 파손되었으며,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지 않으나
거의 완전한 3층석탑이다.
이 탑은 봉정사의 극락전과 건립연대가 같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대의 다른 석탑과 비교하여 특이한 점이나
미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전체적으로 고려 중엽의 석탑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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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당 = 보물 제449호
이 건물은 동쪽에 있는 화엄강당과 같은 시기에 같은 목수에 의하여 건축되어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화엄강당과는 달리
기둥과 기둥의 간격이 좁고 기둥의 키가 높은 구조를 하고 있어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자연적으로 쌓은 축대 위에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놓았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공포는 익공에 가까운 주심포계이며 가구는 고주가 없는 7량가이다.
정면 3칸에는 칸마다 2짝으로 된 띠살문을 달았다.
어간 문의 크기는 중앙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어 좌우의 띠살문보다 높이가 조금 더 크다.
측면과 뒷면은 모두 벽으로 막았고 뒷면의 좌우 협칸에 외문의 띠살문을 달았다.
화엄강당이 판고 등으로 쓰이던 건물이어서 측벽에 살대를 꽃은 통풍창이 있는데 반하여
고금당은 선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살창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좌측면에는 아궁이를 내어 난방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내부는 3칸 통으로 공간 활용을 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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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각
산신(山神) 칠성(七聖)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당우(堂宇)이다.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전통신앙인 삼신신앙과의 습합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가 전래된 후 일반 대중에게 포교하기 위한 방편으로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먼저 호법신중이 되었다가
후대에 원래의 성격을 불교 안에서 되찾게 된 것이다.
산신은 가람수호신으로서의
기증과 함께 산속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으로 받들어지며 자식과 재물을 관장하는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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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
종을 걸어두는 누각으로 종루(鐘樓)라고도 불리 우며, 사찰의 의식도구인 사물(四物 :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걸어놓고
각종 불교의식의 시작과 끝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사용하는데
봉정사는 범종만 달아놓음.
1994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하회마을을 방문하고 이곳 봉정사를 방문하였다.
당시 주지인 문인 스님과 총무인 성묵 스님의 영접을 받으며 만세루 하부문을 고개 숙여 지나 대웅전 경내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불상과 탱화를 살펴본 뒤 "참 아름다운 사찰이다."라며 감탄을 했단다.
여왕은 종교를 초월하여 옛것을 귀히 여기고 숭상하는 겸손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다.
"절은 불상에 대해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즉 불성에 대해 절을 한다."라는 말이 가슴에 닿는다.
여왕은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옮겨 성묵스님으로 부터 극락전에 관해 설명을 듣고
"오래된 하나의 거대한 나무 조각과 같다."며 관심을 보였고,
주변의 돌 하나를 주워 돌탑에 올려놓은 뒤 "돌탑을 쌓았으니 복을 받겠다." 라며 주위를 웃기셨단다.
여왕은 방명록에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다."라고 쓰고 서명을 했단다.
그리고
기와 한 장에 자신의 서명을 하여 시주를 했다니 아마 지금까지 여왕이 절에 시주하는 일은
전 세계를 통해 없을 것이다.
여왕은 "일념만년거(일념만년거 - 좋은 생각 한번이 만년을 간다.)" 라고 쓴 문인 스님의 족자를 선물로 받고,
앞에 펼쳐진 산봉우리들을 감상하고 족자의 글귀처럼 좋은 생각, 좋은 느낌을 가지고
봉정사를 떠나셨단다.
아마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를 방문한 이유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유적을 보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해외여행을 하거나 우리나라에 온 관광객은 현대식 건물이나 도로를 보기보다는 전통문화와 역사 유적지를
찾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전통문화와 역사 유적지를 잘 보존하고 발굴하여 많은 외국 관광객이 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안정사 석조여래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
이 불상은 안동군 월곡면 미질리에서 발굴된 것으로 그 곳에 있던 안정사에 보관되어 있었다.
본래는 연화좌대에 안치된 석불상인데 안정사 주지가 방에 안치하면서 금분을 칠해 원형이 다소 손상되었다.
대좌와 광배는 없어졌다. 그 뒤 안동댐 건설로 안정사가 폐사되면서 1973년부터 이곳에서 보관한다.
신체에 비해 작은 불두에는 나선형 머리카락과 큼직한 살상투가 표현되었다. 당당하고 둥근 어깨에서
느껴지는 양감에 비해 가슴은 대체로 편평하며, 결가부좌를 튼 하반신을 높게 표현하여 안정감이 느껴진다.
손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이 불상의 양식은 통일신라 하대와 것과 유사하므로 제작시기를 9세기 경으로 추정한다.
봉정사 영산암 가는 길
지난
눈비
온 산 나뭇잎 모두 지고
남은
것
앙상한 가지
무슨 사연 있어
봉정사 영산암 가는 길엔 여태 나뭇잎 달렸을까
행여
날 맞이하려 기다렸다면
고맙고
감사할 일이네
그렇다면
되었으니
돌계단 하늘 닿은 영산암 올라
부처님
전
절하고 갈 길 재촉하게
부지런히 가야 내년 봄에 다시 오지 않겠는가
나도
이왕 왔으니 다소곳한 영산암 해우소 들러
온갖
번뇌 버리고
자네
그림자 따라 산 내려가려네
어둡기
전
산 내려가
소문
자자한
안동 찜닭 안주 삼아
밤새워
내린 맑은 술로
긴 동지 밤 달래려네
△
영산암 가는길
봉정사의 요사인 무량해회에서 동쪽으로 약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영산암의 '영산'이란 원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設)하시던, 인도 왕사성 근방에 있는 영축산을 말한다.
법화경을 설법하실 때의 그 모임을 일러 불교에서는 영산회상이라 이름하며 이 모임의 장면을
영산회상도라 하여 법당의 후불탱화로 많이 봉안된다.
봉정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덕휘루를 통하여 대웅전과 극락전을 둘러보고 대부분 이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열고 자연에 동화되며 산사의 고즈넉함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은
사립문을 지나 요사채 뒤쪽 산자락에 자리잡은 이곳까지 발길이 닿는다.
영산암의 출입문인 우화루 밑을 지나 암자의 안마당에 닿으면 고건축의 미학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도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는 마당의 멋스러움에 넋을 빼앗기게 된다.
마당의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동산을 만들어 기암괴석을 옮겨놓고
그 위에 멋스럽게 휘어진
고목인 향나무와 관상수를 비롯하여 계절을 다투며 다양하게 피어나는 꽃나무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각 건물에는 툇마루와 누마루 등이 설치되어 서로 끊어질 듯 이어져 있다.
이러한 것들의 다양함은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재창조하는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 영산암에서 바라본 봉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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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
영화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촬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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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루
우하루- 염화실 - 응진전(나한전) - 삼성각 - 관심당 - 송암당
유흥준 교수는 봉정사 영산암 마당의 멋스러움을
건축가 승효상이 『내 마음 속의 문화유산 셋』이라는 문화칼럼에 연재한 기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 음악에서는 음과 음의 사이, 전통 회화에서는 여백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던 것처럼
전통 건축에서는 건물 자체가 아니라 방과 방 사이, 건물과 건물 사이가 더욱 중요한 공간이었다.
즉 단일 건물보다는 집합으로서의 건축적 조화가 우선이었던 까닭에 그 집합의 중심에 놓여 있는 비워진 공간인 마당은
우리 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며 개념이 된다.
이 마당은 서양인들이 집과 대립적 요소로 사용한 정원과도 다르며
관상의 대상으로 이용되는 일본의 정원과도 차원을 달리하는 우리의 고유한 건축 언어이며 귀중한 정신적 문화 유산인 것이다.
"또한 그는 봉정사가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세 개의 마당
즉 대웅전 앞의 엄숙한 마당, 극락전 앞의 정겨운 마당, 영산암의 감정 표현이 강하게 나타난 복잡한 마당을 통하여
한옥의 멋스러움을 마당을 통하여 느끼게 해 준다.
좁은 마당 바위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 그득하게 서 있다.
비 내려 영산암이 눅눅하니 스님은 부지런히 불을 지펴 방안을 덥히고 있다.
허락만 한다면,
이곳에서 한 달 정도 머물며 주렁주렁 매달린 번뇌를 부숴버리면 좋겠는데.....
영산암 마당에서 우하루 출입문을 바라본다.
△
다소곳한 영산암 해우소
이제 떠나가야 할 시간
사바세계에서 잔뜩 담아왔던 온갖 번뇌를 부처님 세계를 떠나면서 버려야 할 일이다.
버리고 떠나야지.
천등산은 옛적에는 대망산이라 불렀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있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 부르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불문에 들어와 대망산 바위굴에서 계절이 지나는 것도 잊고 하루에 한끼 생식을 하며 도를 닦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휘몰아치는 겨울에도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염(念)하며
마음과 몸을 나른하게 풀어지게 하고 괴괴한 산속의 무서움과 고독같은 것은 아랑곳 없었다.
이렇게 십년을 줄곧 도를 닦기에 여념이 없던 어느날 밤 홀연히 아리따운 한 여인이 앞에 나타나
"여보세요. 낭군님" 옥을 굴리는 듯 낭낭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미처 능인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보드라운 손길이 능인의 손을 살며시 잡지 않는가! 눈을 들어 보니 과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고운 살결에 반듯하나 이마와 까만 눈동자 오똑한 콧날,
거기에는 지혜와 정열이 샘솟는 것 같아 진정 젊은 능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 했다.
여인은 "낭군님" 다시 한번 맑은 목소리로 능인을 불렀다.
"소녀는 낭군님의 지고하신 덕을 사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낭군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사옵니다.
부디 낭군님을 모시게 하여 주옵소서."
여인의 음성은 간절하여 가슴을 흔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능인은 십년을 애써 쌓아온 수련을 한 여인의 간청으로 허물 수 없었다. 능인은 준엄하게 여인을 꾸짖었다.
"나는 안일을 원하지 아니하며 오직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의 공적을 사모할 뿐 세속의 어떤 기쁨도 바라지 않는다.
썩 물러나 네 집으로 가거라!"
능인의 꾸중에 산도 크게 울리는 듯 했다. 그러나 여인은 계속 유혹을 하며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능인은 끝내 거절하였으며 오히려 여인에게 깨달음을 주어 돌아가게 했다.
여인이 돌아서자 구름이 몰려드는가 싶더니 여인이 사뿐이 하늘로 오르며
" 대사는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나는 천상 옥황상제의 명으로 당신의 뜻을 시험코자 하였습니다.
이제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사오니 부디 훌륭한 인재가 되기를 비옵니다."
여인이 하늘로 사라지자 그곳에는 산뜻한 기운이 내려와 굴 주변을 환히 비추었다.
그때 하늘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또 울려왔다.
"대사, 아직도 수도를 많이 해야 할텐데 굴이 너무 어둡습니다.
옥황상제께서 하늘의 등불을 보내드리오니 부디 그 불빛으로 더욱 깊은 도를 닦으시기 바라나이다."
그러자 바로 그 바위 위에 커다란 등이 달려 어둠을 쫓고 대낮같이 굴안을 밝혀주고 있었다.
능인은 그 환한 빛의 도움을 받아 더욱 열심히 수련을 하여 드디어 득도하여 위대한 스님이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등의 덕택으로 수도하였다하여
그 굴은 '천등굴' 대망산을 '천등산'이라 이름지어 불렀다고 한다.
항상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후회하는 말은 "서둘지 말고 머물듯 돌아보자."인데,
봉정사 역시 벗어나지 못했다.
절을 다니면서
처음에는 두 손도 모으지도 않고 지나쳤는데, 속리산 산행 후 법주사에서부터
이왕 왔으면 종교를 떠나 감사하다는 의미로 대웅전 부처님께 절이나 하고 떠나자라는 생각으로 그 후 절을 방문하면
대웅전에 절을 하든 혹은 대웅전 밖에서 두 손 모아 서서 이곳을 오게 되어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봉정사에서 멋진 대웅전,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극락전에서도 감사의 기도도 올리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봉정사는 큰 절은 아니지만,
건물이 지형대로 층층을 이루고 산재하여 있지 않고 오밀조밀 머리를 맞댄 단아하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천 년을 지났으니 앞으로 천 년을 바라볼
봉정사 그리고 영산암.
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이곳을 방문하였는가는 어렴풋이 잡히기는 하였고,
그동안 많은 절을 다니며 느낀 여느 절과는 정결하고 단아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 아름다운 절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극락전도 보았고, 건물 대부분이 국보와 보물로 구성된 아름다운 봉정사를 떠나며
아쉽다면
너무 늦은 시간에 방문하여 곳곳을 더 머물며 돌아보지 못함이다.
화창한 봄날 다시 걸음하고 싶은 진한 여운이 남는 봉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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