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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제주 여행

(제주 서귀포) 진시황의 불로초와 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진시황의 불로초와 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언제 : 2017년 8월 15일 화요일
어디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정방동 100-2



서귀포에는 서불(徐) 또는 서복(徐福)이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한라산)을 찾아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리고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하였다는 설화가 전하여 내려온다.

 

정방폭포에 다녀오니 아침부터 온통 땀으로 범벅이다.

근처 상점에서 얼음물로 더위를 식히고

 바로 옆에 중국풍 아치의 서복공원과 서복 전시관이 있는데,

이곳을 방문하면 승진한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홍보 간판이 있어 흥미로와 이동해 본다.

 

 

 

서복공원

정문은 서귀포 시내 방향에 있고 이곳은 정방폭포에서 서복공원으로 가는 문이다.

 

  

서복 공원

 

 


 

 

이 물이 정방폭포로 떨어진다.




정방폭포 상단


 

 

 




남해 상주리 석각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라고도 하는 그림문자로 상주면 양하리의 평평한 자연암에 새겨진 특이한 형태의 조각이다.

남해 상주리 석각

 

남해 상주리 석각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에 있는 선사시대의 석각화.

중국 진시황 때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불이 동남동녀 500여명을 거느리고 이곳 금산을 찾아

수렵 등으로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이 화상문자를 새겼다고 전해오고 있다.



Daum백과에서 모셔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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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동도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와 우호 교류협력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기중한 이 서복동도도 조각상은 2008년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에 걸쳐 제작되었다.

그림은 진황도시미술가협회 부주석 우지엔쫑이 그렸고 설계는 중국 최고의 미술학부인 중앙미술학원에서

담당하였으며 작품 내용은 진시황이 진황도의 갈석 행궁 앞에서 서복에게 동남동녀 600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건너가 불로초를 구해 올 것을 명하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제원은 높이 2.6m  길이 4.3m  두께 25cm)

 

 

 


 

徐福公園

전시관 입구에는 ‘徐福公園’이라는 휘호가 새겨진 아주 큰 돌이 있는데,

2007년 4월 10일

중국 원자바오 총리가 한중 수교 15주년인 ‘한중 교류의 해’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중 친선협회 이세기 회장이 원자바오 총리에게 서복 공원을 기념하기 위해 휘호를 부탁했는데,

2007년 6월 22일 산동성 정부에서는 이 휘호를 전달받아 돌에 새겨 제주도에 기증하였단다.

 

 

서복전시관 

 


 

서복기사비(徐福紀事碑)

서복기사비는 사마천의 사기(진시황본기), 사기(회남형산열전)에 수록된 것으로서,

서복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도한 내용(365자)이다.

이 비문은 중국 산동성의 서예가 단옥봉이 썼으며, 2008년 4월 산동성 인민정부에서 제주특별자치도와의

우호증진을 위해 기증하였다.

 

 


전시관 입구

두 개의 석상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진시황 청동마차 1호

마차의 전체 길이는 2.57cm, 넓이 95cm, 높이 92cm이다.

마부와 탑승자가 서는 고거 또는 입거 형식의 마차로서 22개의 우산살로 만들어진 덮개가 설치되었다.

마차 위에 방패와 화살 등의 무기들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2호 마차를 호위하는

선행마차로 추정된다.








진시황 청동마차 2호

마차의 전체 길이는 3.17cm, 높이 1.06cm 넓이는 1호 마차와 비슷하다.

마부가 앞에 앉고 뒤에 탑승자가 앉는 안거 형식의 마차이다. 탑승자가 앉는 곳은 지붕과 창문.

문이 달려 있어서 열면 시원하고 닫으면 따뜻해지므로 온량거라고도 한다.

마차 둘레의 동판에 새겨진 문향, 거북등과 같은 지붕, 금과 은으로 만든 방울 장식 등에서 왕과 귀족들을 위한

고급 마차로 추정된다. 이러한 온량거는 고대부터 사용해 왔으며 진시황이 순행할 때 타고 다녔다.

순행 중 병사한 진시황의 시신이 함양에 옮겨질 때까지 부패를 막아 주었다.


  

 

 진시황의 칙서를 받는 서복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

진시황은신선과 불로장생약을 찾기 위해 수많은 방사(천문,의학,신선술,점복 등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인

낭야대(중국 산동성 교남시)를 찾았다.

이곳에서 신선과 불로장생약을 찾아오겠다는 진방사 서복을 만나게 된 진시황

진시황은 서복에게 동남동녀를 거느리고 동도 출항하여 신선과 불로장생약을 찾아오라는

칙서를 내렸다.



서복의 1차 동도(동도)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BC.219(진시황 28)년 동쪽으로 군현을 시찰하고 추역산(추역산)에 올라

진황조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운 후,

 태산(태산)에 올라 봉선(봉선 : 하늘과 땅에 제를 올림)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발해를 따라 낭야산에 올라 낭야대를 짓고 진왕조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웠다.


그 때 진방사 서복이

진시황에게 바다 가운데 봉래(봉래). 방장(방장). 영주(영주)라 불리는 세 개의 신산(신산)이 있는데,

그곳에 신선이 살고 있으니

동남동녀(동남동녀)를 거느리고 불로장생약을 구하러 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진시황은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선발하여 서복과 함께 신선을 찾아 동도(동도) 충항하도록 하였다. 



서복의 2차 동도(동도)

BC.210(진시황 37)년 진시황은 다시 낭야 순행에 나섰다.

서복은 진시황의 징벌이 두려워 봉래산의 불로장생약은 구할 수 있으나 바다 속에 큰 교어(교어 : 용 같은 물고기)가

방해하여 접근할 수 없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활을 잘 쏘는 궁수를 파견해

교어들을 퇴치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진시황은 다시 서복에게 동남동녀 삼천여 명과 오곡의 종자와

여러 기술자들을 싣고 바다를 건너 신선과 불로장생약을 찾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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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초라며 여러가지 한약제를 전시해 놓았다.




중국 국가 주석인 시진핑이 2005년 7월 22일(절강성 당서기 당시)

서복전시관을 방문하여 서명하는 모습

그 후 시진핑은 중국 국가 주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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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의 1차 동도 상서문

 

 

 △

진시황의 1차 동도 칙서문

 

 

 

 


 





 




 

서복(서복)

 기원전 255년에 제(齊)에서 태어났다.

《사기》(史記)권6 진시황본기 및 권118 회남형산열전(淮南衝山列伝)에 따르면,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이후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내보내 불로초를 구하러 사방으로 보냈으나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했다.

 

서불은 이때 자기가 불로초를 구하러 가야 할 차례임을 알고

기원전 219년(진시황 28년),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齊人徐市等上書言 "海中有三神山, 名曰蓬萊、方丈、瀛洲, 僊人居之. 請得齋戒, 與童男女求之." 於是遣徐市發童男女數千人, 入海求僊人.
제(齊) 사람 서불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이에 서불을 보내 동남동녀 수천을 뽑아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아오게 하였다. — 《사기》(史記)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그리하여 기원전 219년에서 210년 사이에 그의 두번에 걸친 여행이 시작된다.

진황도를 떠난 그의 행적은 지금의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폭넓게 이어진다.

그의 여행에는 60척의 배와 5,000명의 일행, 3,000명의 동남동녀와 각각 다른 분야의 장인들이 동반했다고 한다.

기원전 210년 그는 진황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이 제주도를 방문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삼신산 중 하나인 한라산(영주산)을 찾은 서복 일행이 불로초를 찾아보았지만 실패했다고 인식한다.
참고로 일부 학자들은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시로미와 영지버섯을 불로초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후 서복은 서귀포를 떠나는데 풍랑을 만나 표류를 하는 등 악전고투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데
 끝내는 일본 규슈 사가 현 부바이 해안에 상륙, 사가 현 모로토미에서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Daum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