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전남 순천) 태고종 태고총림(太古宗 太古叢林) 조계산 선암사(仙巖寺)

 

태고종 태고총림(太古宗 太古叢林) 조계산 선암사(仙巖寺)

 

 

 

언제 : 2016년 1월 3일 일요일

어디 :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

 

 

진주성과 촉석루를 돌아보고 다시 순천으로 나오는 길에 선암사 겨울 풍경을 보려고

선암사로 향하는데,

이번 신년 산행을 하려던 코스로 아주 좋은 송광사를 출발 조계산 장군봉(884m)을 찍고 선암사로 나오는 길에

많은 사람이 선암사를 나오고 있다.

 

노고단을 올랐다면 이런 아쉬움은 없었을 터인데,

언제 

동서들과 처남들과 어울려 기분 좋게 선암사에서 송광사 코스를 해 볼 날이 있을까?

 

 

 

선암사는 조계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고, 송광사는 조계산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 혼자 송광사를 출발하여 굴목제 보리밥집에서 막걸리와 보리밥을 먹고 선암사로 하산한 적이 두세 번 있는데,

오전에

우리나라 3보 사찰인 송광사를 둘러보고 조계산 굴목재를 넘어

점심때 송광사와 선암사 중간 보리밥집에서 비빔밥과 막걸리로 배를 채우고, 구수한 숭늉을 마시면 이보다 더한 밥상은 없을 듯

그리고

하산 길에 우리나라 태고종 총본산인 선암사를 둘러보는 이 코스는 지금 생각해도

다시 걷고 싶고 추천하고 싶은 참 좋은 도보여행 코스이다.

 

 

 

부도군

 

 

 

우리는 선암사를 이제 들어가는데, 많은 사람이 산행을 마치고 나온다.

멀리

조계산 장군봉이 나무 사이로 희미하게 보인다.

 

 

 

조계산 송광사와 선암사는 큰 사찰임에도 주변에 소나무가 없다.

대체로 큰 사찰 주변에는 천 년 장송들이 우거져 솔향도 좋고 바람소리도 좋더만.....

 

그 이유는

1948년 여순 반란사건과 6.25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빨치산 소탕 작전을 하면서 빨치산이 숨기 어렵게

 나무들은 모두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선암사 부도

부도 11기와 비석 8기가 줄지어 있는데, 부도는 대부분 팔각원당형이다.

그 중에는 사사자가 삼층석탑을 지고 있는 이형부도 한 기도 있다. 이 부도는 부도밭에 있는 벽산대선사비(높이 3.75m)와

같은 시기인 1928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화산대사부도(높이 4.1m)로,

사자 네 마리가 비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전남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보물 제94호, 8세기 중엽 작품)이나

충북 제천 빈신사터사사자석탑(보물 제94호, 1022년)을 닮았다.고 쓰여있다.

 

맨 앞줄 왼편에서 세 번째 부도가 방향이 틀어진 것은

상월대사는 일생의 대부분을 선암사에서 기거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스님이다.

그러나 그가 입적한 곳은 선암사가 아닌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 이 부도비가 바로 보현사 방향을 보고 세워졌단다.

그가 입적하자 3개의 사리가 나왔다고 전해지는데 보현사를 비롯한 세 곳에 부도탑을 만들었고 그 중 하나가 선암사다.

즉, 입적한 보현사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매우 인상적인 부도이다.

 

보물 제400호 승선교(昇仙橋)와 강선루(降仙樓)

 

승선교(昇仙橋)는 1689년 호암스님이 세웠는데

이 다리를 건너므로 해서 오욕과 번뇌를 씻고 선계로 들어선다는 상징이다.

두 개의 무지개다리를 세운다는 것은 그 당시로는 엄청난 공사였을 것이며, 단순한 교통로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강선루(降仙樓)는 1929년 월령선사께서 일제강점기의 어려움에도 세운 걸작이다.

 

강선루와 승선교를 떼어놓고 보면 별 감흥은 없다.

그러나

승선교 아래로 강선루를 바라보는 경은 아마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절경이 된다.

 

 

작년 여름 사진으로 선암사 승선교(보물 제400호)와 또 다른 무지개 다리가 있다.

 

 

 

강선루

 

 

 

강선루에서 본 승선교

 

 

 

삼인당(三印塘) : 전라남도 기념물 제46호

삼인당은 긴 알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선암사 사직에 따르면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이란다.

삼인(三印)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印), 열반적정(涅槃寂靜印)의 삼법인(三法印)을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르는 것이 없고, 나 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므로, 이를 알면 열반에 들어간다는 불교 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다.

 

 

 

하마비

 

 

 

유명한 선암사 편백나무 숲이 나를 반긴다.

일찍 왔다면 귀한 편백림의 피톤치드(phytoncide) 산림욕을 할 일이지만

날은 저물고 시간도 없어 그냥 지난다.

 

 

 선암사 전경

 

 

일제강점기에 찍은 선암사 전경

 

 

조계산 선암사 일주문

 

고청량산해천사(일주문 안쪽 현판/ 절의 옛이름 해천사와 옛 산이름 청량산)

 

 

 

법종루

선암사는 일주문 외엔 다른 문이 없다.

 

 

 

만세루

선암사 강당으로, 대체로 일반 사찰에선 누문(樓門)을 두고 누문 밑으로 해서 대웅전에 이르게 하는데,

선암사에는 누(樓)의 좌우로 돌아가게 했다.

 

 

선암사 대웅전 : 보물 제1311호

다른 절과 다르게 선암사 대웅전에는 문이 없어 밤낮으로 문이 열려 있다.

 

 

 

 

 

 

 

 

 

 

구시

조선시대 : 회화나무

대중공양을 위한 밥 보관 그릇 - 324 x 104 x 98.5cm

 

 

 

원통각

정조 13(1789)년에 정조가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이 대각암에서 100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가 태어나자 후에

순조는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 하였다.

 

 

조선 23대 순조의 친필 - 대복전

 

 

 

 

선암사 선암매 : 천연기념물 제488호

선암사 선암매는 원통전. 각황전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담길에 50주 정도가 있다.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화와 각황전 담길의 홍매화가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었다. 문헌에 전하는 기록이 없어

수령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찰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으로 부터 약 600여년 전에 천불전 앞의 와송과 함께 심어졌다고

전하고 있어 선암사의 역사와 함께 긴 세월을 지내 왔음을 알 수 있다.

 

각황전 담길을 따라 심어진 매화

 

 

 

조계산 아래 선암사 차밭에 스님 한 분이 사색에 잠겨 거닐고 있다.

 

 

 

 

 

 

 

600년을 산 선암사 와송

 

 

 

적묵당

 

 

뒤깐

 유홍준 교수가 세계에서 가장 운치 있는 화장실이라고 극찬한 뒷간으로,

 一자형 건물에 맞배지붕의 겉모습이 장엄하고, 지은 지 400년 됐는데, 재래식 화장실로는 드물게

 남녀 칸도 구분돼 있다.

 

밑이 너무 깊어

함부로

까고 앉지 못하는 선암사 뒤깐

 

 

 

무량수전과 조계산 장군봉(884m)

 

 

 

붉으면 무엇하리,

 

아프게

홀로 피었다

멍들어

서럽게 지는걸.

 

어둔 밤

저만치 담 아래 숨어 바라보는 빛나는 머리

숨소리만

가쁜데.

 

 

 

 

 

 

보라!

두 다리 살점 하나 없이 앙상한 뼈대로 서서

그래도

살아있음을 흉내 내는 나이 든 감나무가 가슴 시리도록 붉은 감을

달고

하루해를 지난다.

 

 

승선교 계곡

두번 째 홍교에서 서서 담았다.

 

 

선암사 특징은 다른절과 다르게 세가지가 없다.

 

첫째는  선암사에는 사천왕문이 없다.

그 이유는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이라 장군이 지켜주기 때문에 불법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는 협시보살상이 없다.

대웅전 석가모니부처님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계시다. 탐진치 삼독을 멸하시고 마구니에게 항복을 받으셨으며

항마촉지인을 하고 계셔서 협시보살상을 두지 않았다.

 

 셋째는 어간문이 없다.

어간문이란 대웅전의 정중앙에 있는 문으로 다른 사찰에는 정중앙의 문에도 사람이 출입이 가능하지만,

선암사에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이 이 어간문을 통하여 통과할 수 있다고 하여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소설가이자 태백산맥으로 잘 알려진 조정래 작가가 이 곳에서 태어났다.

 (위키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