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초지진(草芝鎭)과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5호, 사적 제226호
어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사적 제225호.
초지진(草芝鎭)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한 요새로써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진에는 배 3척을 비롯하여 첨사 이하의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 등이 배속되고 ,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의 세군데
돈데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 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 함대(병인양요)와
1871년 4월 무역을 강요하며 침략한 미국의 아세아 함대(신미양요),
그리고 1875년 8월에 침공한 일본 군함 운양호(강화도조약)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이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진의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여
역사 교육 현장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성축과 홀로 남은 노송에는 당시의 포탄자국이 남아있어 그 날의 아픔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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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에서 바라 본 염하강 건너 김포 대명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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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흔적 - 성벽 아래 우 중앙 흰 동그라미
1. 홍이포는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 군대에서 사용하던 대포 중의 하나입니다.
유럽 사람들이 사용했던 화포라고 하여 '붉은 오랑캐의 화포' 즉 '홍이포(紅夷砲)'라 불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16-17세기 경에 중국 명나라를 통해서 전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홍이포는 700m 거리에 있는 목표물을 맞출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포를 쏘는 원리는, 포의 앞쪽 입구로 화약을 장전하고 다시 포알을 넣은 다음
포 뒤쪽 윗구멍의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 안에서 화약이 폭발하면서 그 힘에 의해서 포알이 날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포 알은 폭발하지 않는 단순 쇠 덩이로,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할 수 있는 능력은 그 당시 서양대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력이 약했다고 합니다.
3. 포의 길이는 대개 250cm 정도, 구멍의 지름은 대개 10cm 정도, 무게는 3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포의 몸을 받치는 수레는 '당차'라고 하는데, 힘센 소나 말이 끌고 다니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포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사용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1866년 병인양요 및 1871년 신미양요 그 후 운양호 사건 때도 강화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강화: 5진(鎭) 7보(堡) 그리고 53돈대(墩臺)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의 방어 시설을 확충하면서
5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등 모두 12개의 진보를 설치하였다. '진'은 '보' 보다의 규모가 다소 큰 부대였다.
각 진보에는 규모에 따라 첨사(종3품), 만호(종4품), 별장(종9품)이 지휘자로 파견되어 부대를 통솔하였다.
5진은 월곶진(첨사), 제물진(만호), 용진진(만호), 덕진진(만호), 초지진(만호) 이고,
7보는 인화보(만호), 승천보(별장), 철곶보(별장), 정포보(별장), 장곶보(별장), 선두보(별장), 광성보(별장) 이며,
12개의 진.보는 각각 3-5개의 돈대를 관할하고 있었다.
돈대는 진과 보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관측과 방어를 담당하는 초소규모의 군사시설이다.
요즘의 군 편대로 이해하자면
진: 요즘의 대대
보: 요즘의 중대
돈: 진과 보에 소속된 초소.
월곶진 : 월곶리 연미정과 황형기념비 근처(옥창돈, 월곶돈, 휴암돈, 적북돈을 관할)
제물진 : 갑곶리 강화역사관이 위치한 일대(갑곶돈, 염주돈, 제승돈, 망해돈을 관할)
용진진 : 연리에 복원됨(용당돈, 좌강돈, 가리산돈을 관할)
덕진진 : 덕성리에 복원됨(덕진돈, 손석항돈, 용두돈을 관할)
초지진 : 초지리에 이미 복원됨(섬암돈, 장자평돈, 초지돈을 관할)
현재-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만 복원되어 있음.
인화보 : 인화리 인화돈의 남동쪽밭과 마을일부(작성돈, 구등곶돈, 광암돈, 인화돈, 무태돈을 관할)
승천보 : 당산리 승천포 부근(낙성돈, 숙룡돈, 소우돈, 빙현돈, 석우돈을 관할)
철곶보 : 철산리 철곶돈 맞은편 철산 교회 부근(천진돈, 철북돈, 의두돈, 불장돈, 초루돈을 관할)
정포보 : 외포리의 '성안이'라고 불리는 곳(석각돈, 삼암돈, 망양돈, 건평돈을 관할)
장곶보 : 장화리 장화감리교회 하단 부근(검암돈, 장곶돈, 북일곶돈, 미곶돈을 관할)
선두보 : 선두리 '진터'로 불리는 정족산성의 서문 아래쪽(후애돈, 동검북돈, 택지돈을 관할)
광성보 : 신현리에 복원됨(광성돈, 오두돈, 화도돈을 관할)
현재-광성보만 복원되어 있음.
초지진을 둘러보고 이제는 덕진진을 향해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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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德津鎭)
어디: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사적 제226호
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로서
효종 7년(165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 주둔지 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5진 7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병인양요(1866)때 양헌수 장군의 부대가 덕진진을 통하여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때는 미국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덕진진 내에는 바다를 향해 경고비가 있는데 이는 1867년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그 내용은 '타국선은 어떠한 경우라도 함부로 이 곳을 통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덕진진의 성첩과 건물은 이때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를 복원하였다.
공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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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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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돈대와 경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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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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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염하강 위의 초지대교
덕진돈대에서 바라본 남장포대
강화의 돈대(墩臺)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돈대는 성벽 위에 석재 또는 전(塼)으로 쌓아올려
망루(望樓)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높직한 누대(樓臺)다.
돈대의 형태는 원형과 방형 2가지가 있으며,
내부에는 2~3단의 마루를 만들고 외부를 향한 벽면에 각 층마다 작은 안혈(眼穴)을 내어 대포·총·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 설치의 기록은 조선시대 문헌에서 나타난다.
〈남한지 南漢志〉에 인조(1623~49 재위) 때 수축된 남한산성에 2기의 돈대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위(金錫胃)의 건의에 따라 강화에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그 명칭과 위치가 그려져 있다.
1796년 완공된 수원 성곽의 서북·남·동북의 3곳에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이를 공심돈(空心墩)이라 불렀으며 수원성(華城)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시설물이다. 현재는 서북 공심돈만이 남아 있다.
이러한 공심돈은 서양 중세 봉건제후 성의 일부인 탑과 유사한데 수원성 성역에 참여했던
정약용이 〈기기도설 奇器圖說〉을 연구한 것으로 미루어 서양 성곽을 본뜬 것으로 짐작된다.
축성연대는 53개 돈대중 49개 돈대는
조선숙종 5년 (1679년) 기미년에 유수 윤이제 재임시 어명에 의한 병조판서 김석주의 지휘를 받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삼도의 승군(僧軍) 8,9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 만에 완축하였으며
빙현돈은 숙종44년 (1718년)에 유수 권성이 축조 하였으며
철북돈은 다음해인 숙종 45년 (1719)에 유수 심현택이 축조 하였고
초루돈은 그 다음에 숙종 46년 (1720)에 유수 어유구가 축조 하였고
작성돈은 영조 (1725)에 유수 박사익이 축조하였다.
그 후 양암돈과 갈곶돈 두 돈대는 너무 오래되어 폐쇄 하였고 51개 돈대만 수호 관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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