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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경기 남양주) 사적 제197호 세계유산 광릉(光陵) - 조선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

 

세계유산 광릉(光陵) - 조선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

(사적 제197호)

 

 

어디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번지

 

오래전

조선 제6대 단종의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 청령포와 장릉을 다녀오면서

수양대군이 어떤 이유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이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하였는데

이제야 광릉을 방문하여 그의 일생을 더듬어 봅니다.

 

 

 

 

 

 

 

 

세종의 첫째 아들이 제5대 문종이며 문종의 아들이 제6대 비운의 단종이며,

세종의 둘째 아들이 제7대 세조이며 세조의 둘째 아들이 제8대 예종이며, 세조의 첫째 아들의 아들이 제9대 성종이 되는군요.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광릉에 하마비가 남아 있습니다.

 

 

광릉(광릉) 사적 제197호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고,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고,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광릉 홈페이지 참조)

 

 

제실

 

 

제실 내부 건물

 

 

제실에서 능으로 올라가는 길옆의 연못인데 풀이 자라 연못인지 구분이 되지 않네요.

 

 

 

 

 

 

 

 

정자각을 중앙에 두고 좌측은 세조의 능, 우측은 정희왕후의 능이며 아래 비각입니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비(碑)

 

 

세조 능을 아래에서 올려다 봄

 

 

 정희왕후 능과 비각

 

 

 무슨 개꼬락지인지,

 잔디보호와 관람객 안전을 위해 왕릉과 왕후릉을 따로 개방한다니.

잔디를 보호하도록 길을 만들어 놓았으면서 무슨 잔디 보호이며, 무슨 위험이 있어 안전을 위한다는지 한심스럽다.

  입장료 1,000원이 문제가 아니라

오가는 경비와 시간 등 국민의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는 이기(利己)이며 홈페이지에도 없는 처사여서

관리자에게 문의를 했더니 위에서 그렇게 하라고 시켰단다.

 

 

세조 능

 

 

세조 능 뒤에서 바라본 풍경

지세를 모르는 내가 봐도 명당인데 아쉽게 물이 없어 연못을 만들었을까?

 

 

다른 왕릉에 비해 묘 둘레 병풍석도 없고 석실과 석각도 없애 비용을 절감하고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신도와 어도도 없애 간소하며 개혁적인 상설제도를 남겨 훌륭한데

왜 친동생과 친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을까?

 

 

세조는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임금이자, 최초로 반정을 일으켜 즉위한 군주로,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1417년(태종 17) 9월 29일 태어났으며,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대군 시절,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으며,

1452년(문종 2)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세종이 병들고 세자였던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자,

그는 동생인 안평대군과 함께 신하들에게 세종과 문종의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형제는

당시 조정 중신들이 왕권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을 보고 탐탁치 않게 여기며 후일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둘째 아들 수양과 셋째 아들 안평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부왕 세종대왕은

수양과 안평을 궐 근처에서 떨어져 있게 했다.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김종서나 황보인 등 의정부 신하들의 힘이 왕권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상황 속에서

왕실과 훈신들은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종친들은 저마다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아우 안평대군 계열이 왕위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되자 수양대군 역시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측근인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하고,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으며,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시키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 정비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 많은 치적을 세워 조선 초기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한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선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유배지에서 죽이는 등 수많은 정적의 피를 보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단종 1) 단종 보위 세력의 정치 주도에 불만을 품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달손을 집으로 불러 자신이 직접 반대파 세력인 김종서를 제거할 것임을 알렸다.

그리고는 미리 권람을 시켜 김종서의 집을 엿보게 한 후 향정, 유소, 종 임운과 함께 바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하였고,

수양대군의 명을 받은 임운은 철퇴를 내리쳐 김종서를 살해하였다.

다음날 새벽,

수양대군은 단종이 있는 시좌소로 가서 환관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단종에게 형식적인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궐 안이 좁다는 이유를 내세워 재상들이 시종을 두고 혼자 들어오게 하여 그들을 순서대로 죽이는 방법으로

미리 작성된 살생부에 오른 인물들에 대한 살육을 하고 이러한 절차를 거쳐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임하며 실제 정권과 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1455년 6월 2일 단종으로부터 옥새를 건네받고 6월 11일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세조는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문둥병으로 이어졌고,

만년에는 왕위 찬탈로 인한 인간적인 고뇌에 싸여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한다.

반면 적장자였던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행위가 유교의 시각으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만큼, 세조의 불교 융성 정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했던 세조 나름의 성리학자 견제수단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의 불교 귀의에 항의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과 훈구 유학자들은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 했으며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 및 신숙주, 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를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다. 음력 9월 7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인 8일에 승하하였다. 당시 나이 향년 52살이었다.

 

 

세조 능의 전경

 

 

세조 능에서 내려와 다시 두 능을 보며 정희왕후의 능을 보지 못한 아쉬움에 관리자를 다시 찾으니

관리자도 보이지 않아 그냥 돌아옵니다.

 

 

정희왕후의 능은 zoom 하여 봅니다.

 

 

그의 사후 단종을 암군으로 보고,

그가 과단성있게 반정을 일으켜서 국정을 안정시켰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으나,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본격 정계에

진출하고  도학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1910년대까지도 사사로운 탐욕으로 어린 조카를 폐출한 폭군, 비정통 군주로 평가되었고,

지금도 대부분 그렇게 평가되고 있다.

 

 쿠데타 coup d'État

무력에 의해 정권을 빼앗는 일. '국가에 대한 일격'이라는 뜻이다.

혁명이 피지배계급에 의한 반란인 데 비해, 쿠데타는 일부 지배권력이 자기의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이 장악하고 있는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수행되며, 권력이동은 지배계급 내부의 수평이동에 불과하다.

쿠데타는 군대, 경찰, 그밖의 무장집단 등에 의해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되며

정권탈취 후에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계엄령 선포, 언론 통제, 반대파 숙청, 의회의 정지, 헌법 개폐(改廢) 등의 조치를 취한다.

일반적으로 쿠데타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을 국가적인 규모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위기, 기성 정치권의 무능,

의회의 정상적인 기능 마비 등이며, 또 이에 대해 국내에 유일한 무력조직으로서의 군대나 경찰 및 이를 지휘하는

야심적인 정치가나 장군 등의 존재이다.

인용:"쿠데타"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