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개발로 한없이 낮아진 심곡서원과 조광조 묘
(경기 유형문화재 제7호, 경기도 기념물 제169호)
어디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1동
약 30년 전,
수원에서 수지 가는 도중에 보았던
정암 조광조 선생 묘와 사당인 심곡서원을 오랜만에 찾아 나섰습니다.
그때 한적한 산속에 있던 심곡서원과 조광조 선생의 묘는 천지개벽 같은 개발로 고층 아파트에 의해 포위를 당하여
조선 최고의 개혁가인 정암의 묘와 서원은 한없이 낮아져 있었습니다.
도로에서 본 심곡서원
홍살문
심곡서원(深谷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호인 심곡서원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1482~1519)를
기리기 위해 효종 원년(1650)에 건립된 서원으로 현종 14년(1673)에 강당이 중건되었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던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광조(趙光祖)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기에,
연산군 때의 폭정을 개혁하기 위하여 중종에 의해 등용된 인물로, 향약 보급운동, 반정공신위훈(反正功臣僞勳) 삭제,
현량과(賢良科) 실시 등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훈구대신들이었던 남곤, 심정 등의 정치적 반격이라 할 수 있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지금의 화순)로 유배가서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으며,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으로 추중되고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재향되었습니다.
* 훈구파 - 중종 반정 때 연산군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운 기득권을 가진 보수파.
* 기묘사화(己卯士禍) - 1519년(중종 14년) 이상주의적 급진적 개혁세력인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진보세력이
훈구파인 남곤, 홍경주 등에 의해 숙청된 사건.
* 위훈삭제(僞勳削除) -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의 개혁과정 중 중종반정의 공신 117명 중 뚜렷한 공로가 없는 공신 76명을
공신에서 삭제하고 직위를 박탈, 나라에서 내린 전답과 노비 등을 환수하여 나라에 귀속시킨 사건으로
기묘사화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음.
* 주초위왕(走肖爲王) - 위훈삭제 사건 이후 훈구파는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을 제거하기 위해 중종의 후궁인 홍경주의
딸을 이용해 궁중 안의 나뭇잎에 “주초위왕” 즉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네 글자를 꿀로서 쓴 뒤,
벌레가 갉아먹게 해 중종에게 고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 사건을 계기로 급진개혁파인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은 기묘사화에 휘말리게 됨.
강당 - 일소당
심곡서원
전면에는 홍살문이 있고 경사지에 외삼문(外三門). 일소당(日昭堂). 내삼문(內三門). 사우(祠宇). 장서각(藏書閣)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08년에는 동 . 서재를 복원하였답니다.
일소당(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 및 유림의 회합과 학문의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서원에서는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 4두입니다.
심곡서원은 조광조 선생의 묘소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포은 정몽주 선생을 재향하는 충렬서원에 입향하였다가 선조 38년(1605) 위패를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효종 원년(1650)에 서원이 건립되어
그 해에 심곡(深谷)이라는 사액(賜額 : 임금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을 받았고,
사당에는 조광조와 양팽선(梁彭孫)을 배향하였습니다.
양팽선은
조광조 보다 6살이 아래지만 평생을 같이 한 사람으로, 기묘사화 때 영의정이던 정굉필의 적극적 비호로 죽임을 면하고
능주로 귀양 갔을 때 조광조를 위해 상소를 하다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내려가 조광조를 보살폈으며
조광조가 죽임을 당하자 시신을 거둬 고향인 용인으로 가게 한 사람.
서재(유생들의 기숙사)
동재(유생들의 기숙사)
장서각에는 67종 486책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1985년에 도난당하여 현재는 『정암집』외에 몇 권만 남아 있습니다
치사제
내삼문은 자물쇠로 잠겨있습니다.
사당에는 조광조와 양팽손 두 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데, 내삼문이 잠겨 있어 담 밖에서 촬영
양팽손은 생원시에 같이 등과한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평생 뜻을 같이했던 지인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조광조는 그에 대해
"더불어 이야기하면 마치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서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뒤의 가을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人慾)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답니다.
보호수(경기-용인-25) - 느티나무 - 수령 약 400년 - 사당 후면
사실
조선 개국 부터 영조까지 340년간 28차에 걸쳐 945명의 공신이 탄생되었는데,
중종 반정시 공신으로 책봉된 사람은 105명으로 개국 공신 55명에 비해 너무 많음은 중종이 반정공신들의 힘에
끌려다녔기에 조광조 등 신진세력을 이용하여 훈구파의 힘을 분산시키려 했으나 결국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과 76명의
위훈삭제 사건으로 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귀양을 가 사약을 받게 됩니다.
보호수(경기=용인-25) - 느티나무 - 수령 약 500년 - 서원 신축당시 식재된 것으로 추정
연못
天圓地方, 하늘은 둥굴고 땅은 모나다. 소우주(小宇宙)가 이곳에도 있습니다.
사당의 풍경
측면에서 본 심곡서원
조광조 선생 묘로 가는 길에 본 심곡서원 전경
신도비
심곡서원에서 보면 우측 야산, 걸어서 5~10분 정도 거리에 묘가 있습니다.
조광조 선생의 묘 아래에는 예전에는 없던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개혁을 추진하려다 기묘사화로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아 절명한 선생의 못다 이룬 꿈처럼 휘어져 있어
가슴 아립니다.
너무 급진적 개혁은 반발이 강할 수 밖에 없음을 교훈 삼아
우리 세대의 절대 필요한 개혁은 슬기롭게 이루어 좋은 나라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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