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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경기 남양주) 한눈에 보는 다산(茶山)의 자취

 

한눈에 보는 다산(茶山)의 자취

 

 

농로를 따라 걸으면 어디선가 향긋한 내음이 가슴에 들어와

삶에 찌든 마음을 씻어 내립니다.

 

산천이 푸르른 요즈음,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이 만나 유유한 팔당호반에 자리한 다산 유적지와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선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꼿꼿하고 검소한 다산의 자취가 남아있는

다산 길을 걷는 것도 좋습니다.

 

 

 

 

 

다산의 생장(1762~1782)

1762년(여조38년) 6월 16일 정재원과 해남 윤씨의 4남으로 15세(1776)에 풍산 홍씨 홍화보의 따님과 혼인.

서울에 살면서 16세(1777)에 이승훈 이가환 등과 만나고, 성호 이익의 유고를 읽고서 실학에 뜻을 둠.

아버지가 부임한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전 등지에서 과거공부를 함.

 

 

 

 

 

다산의 벼슬시절(1783~1800)

22세(1783)에 과거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함. 23세(1784)에 한강을 따라 서울로 오는 배 안에서 큰형(약현) 처남인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말을 듣고 큰 감명을 받음. 28세(1789)에 문광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 31세 수원화성 설게, 거중기 녹로 등을

고안. 33세 경기도 암행어사, 36세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 되었으나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다는 사직상소를 올려

황해도 곡산부사, 38세에 3농정책을 밝힌 '응지론농정소'를 올림. 39세 1800년(기묘년) 봄 고향으로 돌아와 당호(堂號)를

여유(與猶)라 하고 은둔함. 그해 여름 정조 승하함. 

 

 

 

 

 

 

 

 

 

 

 

 

 

 

 

 

 

다산의 유배시절 (1801~1818)

40세인 1801년(신유년) 2월, 책롱사건으로 다산의 3형제 체포됨, 셋째형 약종은 사형 당하고,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됨. 10월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 다시 서울로 압송, 조사를 받고 11월 약전은 흑산도,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됨. 강진에서 다산학을 이룩함. 55세(1816) 둘째형 약전 흑산도에서 죽음.

57세(1818) 8월 18년만에 유배에서 풀려 9월 초 고향 돌아옴.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완성.

 

 

 

 

 

다산의 만년(1819~1836)

61세 회갑을 맞아 '자찬묘지명'을 지음, 75세인 1836년 2월 22일 여유당에서 세상을 뜸

1910년(순종4) 7월 18일 정이품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고 시호를 문도(文度)라 함.

 

 

다산은 5백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는데

대표작으로 1표2서(一表二書)와 의학서(醫學書)마과회통을 들 수 있습니다.

 

경세유표(經世遺表)

국가경영의 전반적인 제도 개혁방안으로 폐해를 드러낸 낡은 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내놓은 책- 낡은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것.

 

목민심서(牧民心書)

제도 개혁을 기다리지 않고 현재의 법으로라도 목민관이 각성하여 선정을 베풀기를 기대하여 내놓은 책.

목민이란 백성이 자유롭고 넉넉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준다는 뜻.

 

흠흠신서(欽欽新書)

옥사(옥사)에 관한 책으로 흠(欽)이란 삼간다는 뜻. 삼가고 삼가는 것이 형벌을 다스시는 근본이라 함.

 

마과회통(麻科會通)

백성을 괴롭히던 마진(홍역)을 깊이 연구하여 내놓은 의학서로 우리나라 마진학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고 이으며

부록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E.제너의 우두방(牛痘方)을소개함.

 

 

팔당호반의 수월정(水月亭)

 

 

정조대왕과 정약용의 한자 내기

 

 

여유당전서

 

 

정약용의 정신적 스승 성호 이익(星湖 李瀷)에 대한 글

 

 

사실 茶山은 나이가 어려 星湖에게 실제 수학하지 않았지만,

성호의 책을 접하고

실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다산은 성호를 스승으로 생각합니다.

 

 

다산 산책로를 걸으며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정약용은 억울하게 유배생활을 하였지만, 오히려 학문에 힘써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묘지명이란 죽은 이에 대해 간략히 일생을 정리해 밝히는 것으로 대개 가가운 친지가 쓰나 정약용은 스스로 씀.

결국 자서전인 셈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茶山의 봄날 수종사에 노닐다

 

 

열수 ; 정약용은 열수라는 이름이 한강을 가르키는 것을 고증했고 열수라는 호를 즐겨 사용했고,

다산이라는 호는 유배지 강진에서 얻은 것입니다.

 

여유 : 정적(政敵)들의 공격이 드세 고향에 돌아와 당호를 여유라 했는데,

노자의 도덕경에 "여(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둣하고, 유(猶)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하도다."라는 말이 있는데

처신을 삼가자는 뜻입니다.

 

 

실학(實學)

 

실학은 경기도 안산의 星湖 이익(李瀷)을 선두로, 남양주 茶山 정약용이 집대성한

조선후기 근기(近畿) 지방에서 등장한 유학의 새로운 학풍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나라가 황폐화되어 이에 대처하기 위한 여러 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학문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장학(詞章學)이 아니면 주자학적 성리학(性理學)이나 형식적 예학(禮學)에 머물러

이러한 학풍을 반성하고 백성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국가의 총체적 개혁과 대외개방을 지향하려는

새로운 학풍을 실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실학은

조선후기의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양문물을 참조함과 동시에

고대 유교경전의 재해석을 바탕으로 조선후기의 개혁방향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