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인천) 비 내린 날 찾아간 인천 도호부

 

비 내린 날 인천 도호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언제 : 2013년 5월 9일 목요일

어디 : 인천 남구 문학동 349-2번지

 

오전에 잔뜩 흐린 날씨임에도 배낭을 꾸려 아산 현충사를 가려는데

예상보다 빨리 비가 내립니다.

 

집을 나섰는데 그냥 귀가하기는 멋쩍어

우산을 받고

인천 문학경기장 인근에 있는 인천 도호부 청사로 향합니다.

 

 

인천 도호부 청사 가는 길에 유채꽃

 

 

인천도호부청사

(仁川都護府廳舍) 

도호부는 조선시대 행정기관의 하나로

상급기관인 목(牧)과 하급기관인 군(郡). 현(縣) 사이에서 행정을 담당했던 관청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도(道)로 나뉘고

도(도) 아래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을 두고 지방행정업무를 관장하였습니다.

인천에 도호부가 설치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 학자이자 명신(名臣)인 강희맹(姜希孟)이 쓴

'인천부승호기(仁川府陞號記)'에 1424년 이미 객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최소한 그 이전에 도호부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인천도호부에는

당초 왕권이 상징인 객사를 비롯하여 부사의 집무처인 동헌(東軒), 내동헌(內東軒) 등 15~16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현재는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객사와 동헌 일부만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곳에 복원한 건물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화도진도(花島鎭圖)" 를 근거로

객사, 동헌, 공수 등 7동의 건물을 복원하였답니다.

 

 

삼문(三門)

삼문은 임금의 위패를 모신 객사에 출입하기 위하여 설치된 문

 

 

 객사(客舍)

 

객사는 임금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東軒)보다도 격이 높았으며

관아 시설 중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하며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하며,

객사는 신성한 건물로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설계되었는데 가운데 채가 좌우 채보다 한 단 높은 솟을대문 형식의 지붕입니다.

전패(殿牌)를 모시고 있는 가운데 채가 전청(殿廳)이며, 부사(府使)가 정기적으로 예(禮)를 올리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며,

좌우의 익사(翼舍)는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접대와 숙소로 이용되었답니다.

  

 

전패(殿牌)를 모시고 있는 전청(殿廳) 조형물

 

 

 공수(公須)

공수는 객사의 부속건물로 부엌, 곳간, 온돌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능으로는 객사를 관리하는 인원과 중앙 사신을 수행한 수행인력들이 유숙하고, 객사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곳으로

이들 업무를 주관하는 곳이 공수청(公須廳)입니다.

 

 

 

 

 

객사에서 동헌으로

 

 

아문(衙門) 

 관아의 정문으로 2층으로된 누대(樓臺)에 위풍당당한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이 문은 세 칸으로 나눠 있어 외삼문이라 하는데, 가운데 문은 주로 수령만 출입하고 좌우문은 일반인이 이용하였습니다.

 

 

이 문에 이르면 수령 이하 모든 사람이 말에서 내려

 걸어서 출입하는 것이 통례였으며, 좌우에 건장한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막았으며,

 또한 대문의 공간 일부를 이용하여 민원인들의 임시 대기실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안쪽 측면에서 본 아문

 

 

 중문(中門)

중문은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으로 6방관속들의 집무처이기도 합니다.

 

 

인천도호부청사 전경

 

 

동헌(東軒) 

동헌은 부사(府使)의 집무실로서 객사(客舍)의 동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건물의 격식은 객사보다 한 단계 떨어졌으나 그 지역 최고 실력자의 지위에 합당하게끔 위엄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중앙은 마루로 된 대청으로 지방의 일반행정업무와 재판이 여기서 행하여 졌고,

좌우의 온돌방은 숙식공간 보다는 사무공간이나 응접공간이며, 수령의 가족이 머무는 내아(內衙)는 따로 배치되었습니다.

 

 

도호부사의 임무

도호부사는 도호부의 모든 행정을 통괄하는 자로서 그 주된 임무는 수령 칠사(수령칠사)라 하여

① 농사와 누에치는 일을 잘 돌볼 것 ② 인구를 늘릴 것 ③ 교육을 진흥시킬 것 ④ 군대에 관한 사무를 바르게 할 것

⑤ 부역을 균등히 할 것 ⑥ 민사의 소송을 바르게 할 것 ⑦ 간교하고 교활함이 없도록 할 것 등 지방수령의 공통임무에 속해 있으며

지방관의 치적은 관찰사를 통해 매년 임금에게 보고되었답니다.

또한 유사시에는 군대를 지휘하여 전투에 임하는 등 군사지휘권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비는 내리는데, 현장 실습 교육을 나온 고등학생들이 나를 위해 배우가 되었습니다.

 

 

형틀

 

 

동헌에서 본 아문과 중이문

 

 

 비를 맞으며 서 있는 향나무와 인천도호부 청사

 

 

초가집

 

 

방 안의 풍경

 

 

부엌의 풍경

 

 

부엌의 풍경

 

 

인천도호부청사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조직은

1413년(태종 13년)에 전국을 8도(道)로 나눠 道밑에는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등이 있었으며, 인천도호부내에는

 10개의 면(면)과 그 밑에 다수의 동(洞), 리(里), 촌(村)이 있었고 그 밑에는 매 5호(戶)를 한 개의 통(統)으로 하는

 5가작통제(五家作統制)가 시행되었습니다.

 

도호부는 중앙에서 파견된 도호부사 아래에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방(公房)의 6房을 두어 사무를 분담케 하였고 이를 담당하는 자는 지방의

향리(鄕吏)였으며 , 1485년(성종 16년) 경국대전에 규정된 당시 도호부 향리의 수는 26인이나

그 수는 점차 증가되었고, 인천부읍지에 의하면 관할구역은 1748년(영조 24년)에는 강화, 영종, 덕적도등이 인천에 속했으며

  인구는 2천6백여가구에 8천여명이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가 내려서 인지

현장 실습 나온 고등학생들과 학생들을 통제하는 예쁜 여자 선생이 있을 뿐

인천 도호부 청사는

적막 속에 젖은 내 발자욱 소리만 공간을 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