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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시 유형문화재 제20호)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용흥궁(龍興宮)

 

강화도령 조선 제25대 철종의 잠저 용흥궁(龍興宮)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어디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

 

강화도령 

조선 제25대 왕이 된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을 둘러보기 위해 강화도를 찾았습니다.

오전에 맑던 하늘이

오후 들어 느닷없이 바람불고 구름 일더니 눈과 비가 섞여 약 1시간을 내린 후 기온이 급강하하여 서늘합니다.

 

 

이곳은 조선 제25대 왕 철종(재위 : 1849~1863)이 왕이 되기 전

강화도령으로 19세까지 살던 곳으로 

귀양살이 하던 초가집을 그가 왕이 된 후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고쳐 짓고 용흥궁(龍興宮)이라 하였고 (1853년 : 철종 4)

고종 광무 7년(1903) 청안군 이제순이 중건을 했답니다. 

 

 

강화도령 첫사랑길 ☞ 강화나들이길

 

 

용흥궁 안내간판

 

 

용흥궁 입구와 비석

 

 문 왼쪽에 2기의 선정비가 있는데,

하나는 원범(元範, 철종의 초명)을 왕으로 모시기 위한 봉영대신 정원용(鄭元容)의 것이고

하나는 이곳에 용흥궁을 지은 강화유수 정기세의 것으로,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다. 

  

 

용흥궁 입구

 

 

용흥궁 안내도

 

 

 

 

 

안채 - 정면 7칸, 맞배지붕

 

 

안채에서 사랑채로 연결되는 문

 

 

행랑채

 

 

사랑채- 정면 6칸, 팔각지붕

 

 

사랑채 아궁이

 

 

측면에서 본 사랑채

 

 

 용흥궁은 내전, 외전, 별전 각 1동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채와 사랑채를 정확히 담장으로 구분하였으며 지반의 높낮이도 큰 편으로

 전체적인 모습은 소박한 사대부집의 형식을 하고 있다.

 

 

 사랑채 왼쪽에는 이곳이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을 알리는 비[哲宗朝潛邸舊基]가 있다. 

 

  <철종실록>에 의하면,

철종이 등극하기 몇 달 전부터 밤마다 이곳(초가집)에 광기(光氣)가 비쳐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곳에서 ‘용(龍)이 일어 날(興)것’이란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철종조잠저구기(哲宗朝潛邸舊基)

 

제 25 대 철종실록(哲宗實錄).

강화도 농부에서 왕이 된 “원범”.

1849~1863, 제위기간 14년 휘는 변.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순조의 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세도정치가 시작됨. 


철종시대는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때였으며,

세도정치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럴 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뻘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왜냐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안동 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왕가의 법도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이다.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세손이 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세력들이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자기들의 위치가 위험할 것이 염려되어 새 왕자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막내아들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에 유배되나,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병사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긴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 인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큰아들인 상계군 담은 1779년 정조 3년 홍국영의 음모로 모반죄로 몰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한편 은언군의 아내 송씨와 큰며느리 신씨는 1801년 순조 1년에 천주교 신자로 사사되면서 은언군 인도 사사되었다.


그러던 중 1844년 헌종 10년에 민진용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순조 말기부터 김유근과 김홍근에 의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다가 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나자

권력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여기에 연루되어 전계대원군 이광의 첫째 아들 원경이 사사된다.

 여기서 둘째 아들 경응과 셋째 아들 원범만이 살아남는데 이들은 또다시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리하여 천애고아가 된 두 사람은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년여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원범에게 왕통을 이으라는 교지가 내려진다.


 

 

그가 바로 후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 철종이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였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별안간 명을 받은 원범은 봉영의식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단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학문을 연마한 바 없다는 이유로

1851년까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21세 되던 1851년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게 되었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이 되어 국사를 돕게 되니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는 셈이었다. 여기서 의문이 되는 것은

둘째를 제치고 셋째인 원범이 왕위에 오르게 된 내력이다.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둘째 경응은 아마도 강화도에서 병사하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1857년(철종 8) 순원왕후가 죽자,

안동김씨와 반목하던 조대비(풍양 조씨, 신정왕후神貞王后, 순조의 세자인 익종翼宗의 비)는 대왕대비가 되었고,

1863년 철종이 죽은 후,

조대비는 이하응(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희,이명복)을 양자로 맞아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고종이다.

조대비는 고종을 여흥 민씨 자영과 혼인시켜

그간의 세도가들의 전횡을 일소하려고 하지만 결국 민씨 세도정치기를 거치며 오비이락으로

조선왕조는 황후와 황제의 비극적 죽음과 함께 나라에 한을 남기고 폭싹 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