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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사적 제195호) 세계문화유산 영릉(寧陵)

 

세계문화유산 영릉(寧陵)

사적 제195호

 

 

세종대왕 영릉(英陵)을 나와 우측 숲길을 걷다보면

조그만 고개 너머

조선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가 묻히신 영릉(寧陵)이 나타나는데 아련한 솔 내음과 맑은 공기 그리고 고즈넉함에 

사색을 하며 걷기에 참 좋습니다.

 

세종대왕 영릉의 은 세종대왕이 생전에 업적이 많아 '꽃부리 영'으로 썼으며,

효종대왕 영릉의

효종이 청나라에서 8년간 인질로 계셨고, 생전에 고생을 많이하여 '편안할 영'으로 썼다고 합니다.

 

 

세종대왕 英陵에서 효종대왕 寧陵으로 가는 길 

 

 

잘 단장된 세종대와 영릉(英陵)과 달리

바로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종대왕 영릉(寧陵) 단장은 소박하여 찾는 이가 적어 비교적 조용한 편입니다.

그러나

제실 앞 회양목은 수령 300년을 헤아리는 천연기념물 제459호이며,

재실은 조선왕릉 재실 중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겨져 있어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된 볼거리가 있습니다.

 

 

 

 

 

 

제실 내부 전경으로 볼거리가 있고 고목이 인상적입니다. 

 

 

 

 

 

 

제실을 지나 영릉으로 가는 길 

 

 

 

영릉(寧陵)의 금천교는 홍살문 안에 있어 영릉(英陵)과는 다르며,

두 능이 나란하지 않고 엇비슷하게 있어 특이합니다.

 

 

영릉을 중심으로

좌측=수라간, 중앙=정자각, 우측=비각, 맨우측=수복방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동원상하봉릉으로

구리(九里) 건원릉(建元陵) 부근에서 1673년(헌종 14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정자각 뒤 봉분은 오른쪽이 왕비릉이고 왼쪽이 효종릉이며, 왕비릉엔 둘러쳐진 곡장이 없고 왕릉에는 곡장이 있습니다.

영릉은 다만 쌍릉이면서 앞뒤로 엇비슷하게 위치를 잡고 있어

지형과 상관 없이 애당초 ‘나란히’ 놓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그 밖의 석물들은 똑같이 갖춰져 있는데,

 배치와 양식은 조선전기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답니다.

 

 

효종왕릉

 

 

 

 

 

 

 

 

인선왕후릉

 

 

인선왕후릉에는 둘러쳐진 곡장(묘를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寧陵에서 바라본 전경으로 英陵은 앞이 탁 트여 시원한 반면 이 곳은 그렇지 못합니다.

 

 

 

 

 

병자호란(1636년)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고립되었다가 삼전도에서 직접 청태종에게 항복한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 심양에 8년 동안 억류 되었다가 귀국하여 소현세자가 병으로 죽자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정 1649년 효종으로 즉위하자마자 강한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었는데

1659년 효종이 갑자기 서거함으로써 북벌계획은 중단되었습니다.

 

 

세종대왕릉은 많은 사람이 오는데 비해

1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효종대왕릉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아주 한적하고 쓸쓸하였습니다.

홍살문 안쪽에 금천교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