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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강화)고려왕릉 2- 석릉(碩陵)

 

고려 21대 희종(熙宗)의 석릉(碩陵)

 

어디: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182

사적 제369호

 

진강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석릉(碩陵)은

 고려 21대 희종(熙宗, 1181 ~ 1237년)의 무덤이다.

희종은 최충헌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재위 7년(1211년) 폐위되어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고종 24년(1237년) 8월 용유도에서 세상을 떠나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래서일까?

석릉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불은면 소재지에서 카톨릭대학 방향으로 가다 고개를 넘으면 곤릉 안내판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석릉 안내판이 보인다.

 

도로에서 석릉까지 거리가 1.7km. 산길 1.7km는 만만치 않는 거리다.

마을 끝에서 노인에게 석릉으로 가는 길 맞냐고 물었더니

맞다며 "가지 말라신다." 왜냐고 물었더니 "숲이 차서 길도 나빠" 가기가 쉽지 않단다.

설마 왕릉인데 길이야 잘 정비 되었겠지 생각으로

숲길로 들어섰는데

어느 왕릉의 길이 이럴까? 

길은 좁고 풀이 자라 어디가 길인지 알 수 없고 조그만 고개를 넘어야 안내판이 있다.

산 깊숙이 모퉁이 길을 돌고 비탈을 몇 분 올라가니

그곳에 석릉이 숨어 있었다.

 

 

 

 

 

 

 

 

 

 

 

 

 

 

 

 

 

 

 

그랬을 거다.

최충헌을 제거하려고 했으니

결코 풍광 좋은 곳에 무덤을 쓰기 어려웠기 때문에

고개 넘고 모퉁이 길 돌고 비탈 올라 앞에도 산이 막힌 열악한 곳에 묘를 썼는지 모르겠다.

또한 

이성계가 조선건국을 조건으로 '왕'을 쓰며 중국과 군신관계로 조선을 유지하고

정책도 고려의 불교정신을 배제하며 고려 흔적을 지우는 데 치중했다. 그 결과 500년 고려 역사는

 삼국시대 역사보다 보잘 것 없이 기록돼 있고,

도읍이 이북에 있었던 관계로 관리 소홀이나 의도적 방치였을 가능성도 있다.

 

희종(熙宗, 1181년 ~ 1237년)은

고려 제21대 국왕(재위: 1204년~1211년)이다.

 는 영(韺), 는 불피(不陂), 시호희종인목성효대왕(熙宗仁穆成孝大王). 신종선정왕후의 맏아들이다.

1204년부터 1211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최충헌(崔忠獻)이 실권을 맡았다.

1200년, 태자로 책봉되고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1205년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하였으며 1206년에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봉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으며 1207년 최충헌의 청으로 유배자 300여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 개성 대시(大市) 좌우의 긴 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오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미속(米粟)을 내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를 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뒤이어 자란도(紫鸞島)로 옮겨졌고 1215년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다가 1219년 서울에 봉영(奉迎)되었다. 이렇게 서울에 돌아와서 딸 덕창궁주(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성(珹)과 혼인시켰다.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1237년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성효(誠孝)이며 능은 강화도 양도면에 위치한 석릉(碩陵)이다.

 

남한에 있는 고려 왕릉은

명실공히 석릉(21대희종)과 홍릉(23대고종)이 왕의 무덤이고

곤릉과 가릉은 왕비의 무덤이다. 

그러나

가야고분이나 신라.백제 그리고 조선의 많은 왕릉과는 비교되지 않을 뿐더러

관리도 안되어 일반인의 무덤보다 못하다.

 

일부러

봉분도 크게 하고 주변도 화려하게 보존을 바라는 게 아닌

최소한 진입로와 안내 간판이라도 제대로 정비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