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비(三田渡碑)
언제: 2012년 9월 4일 화요일 비 내리는 날
어디: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서호
1639년(인조 17)에 한강 상류인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세운 청(淸)태종의 공덕비.
사적 제101호. 높이 395㎝, 너비 140㎝. 이수(螭首)와 귀부를 갖춘 커다란 비이며,
비문에 새겨져 있는 원래 명칭은'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고립되었던 인조가 삼전도에서 직접 청태종에게 항복한 사실을 담아 세우고 이것을
대청황제공덕비라고 했다.
당시 청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울에 침입하여 삼전도에서 진을 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항복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려는 청태종의 강요에 의해서 세워졌다.
당시 비문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竣)이 해서로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새겼다.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으로,
오른쪽에는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사방 7품의 해서로 씌어진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기록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비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 만주어: Daicing gurun i Enduringge Han i gung erdemui bei()
- 몽골어: Dayičing ulus-un Boɤda Qaɤan-u erdem bilig-i daɤurisɤaɤsan bei
- 중국어: Daqing Huangdi Gongde Bei (大清皇帝功德碑)
삼전도비의 모양은 초석(비석 받침대)이 거북이 모양이고 비석 위에는 용들과 여의주가 조각되어 있다. 맨 위의 모양은 전쟁의
승리국인 청의 황제를 뜻하고, 비석은 청나라를 뜻하며, 그것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는 조선을 나타내는 것이다.
삼전도비의 수난
원래는 한강변 삼밭나루터의 항복을 했던 곳에 세워졌다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조공 관계가 단절되자 강물에 수장시켰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3년에 일제가 다시 세워놓았고,
1945년 광복 직후에 주민들이 땅 속에 묻어버렸다.
1963년에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났고,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1983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옮겼다. 이후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25일에 비석이 서 있던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수중에서 30여m 떨어진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겼다.
2007년 2월 3일 오후 9시 40분경 백모(39)씨는 삼전도비에 붉은 페인트를 사용해 '철거 370'이라고 적어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정치인들이 나라를 잘못 이끌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점을 경고하기 위해서"
삼전도비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또한 '370'은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꿇은 지 370년이 지났다는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조선왕 인조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장면(삼전도비 부조상)
정축하성(丁丑下城)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농성 59일만에 만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
1637년 1월 30일 (음력)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한 것을 말한다. 흔히,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표현된다
당시 인조는 절대 항복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단순히 성에서 나온다는 뜻인 하성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위키백과)
碑文全文(漢文) [編集]
大清崇德元年冬十有二月 寬温仁聖皇帝 以壞和自我 始赫然怒 以武臨之 直擣而東 莫敢有抗者 時我寡君棲于南漢 凛凛若履春冰而待白日者 殆五旬 東南諸道兵 相継崩潰 西北帥逗撓峽内 不能進一歩 城中食且盡 當此之時 以大兵薄城 如霜風之卷秋蘀 爐火燎鴻毛 而皇帝以不殺爲武 惟布德是先 乃降勅諭之曰 來 朕全爾 否 屠之 有若英馬諸大將 承皇命相屬於道 於是 我寡君集文部諸臣謂曰 予托和好于大邦 十年于茲矣 由予惛惑 自速天討 萬姓魚肉 罪在予一人 皇帝猶不忍屠戮之 諭之如此 予曷敢不欽承 以上全我宗社 下保我生靈乎 大臣協贊之 遂從數十騎 詣軍前請罪 皇帝乃優之以禮 拊之以恩 一見而推心腹 錫賚之恩 遍及從臣 禮罷 即還我寡君于都城 立召兵之南下者 振旅而西 撫民勸農 遠近之雉鳥散者 咸復厥居 詎非大幸歟 小邦之獲罪上国久矣 己未之役 都元帥姜弘立 助兵明朝 兵敗被擒 太祖武皇帝 只留弘立等數人 餘悉放回 恩莫大焉 而小邦迷不知悟 丁卯歳 今皇帝命將東征 本国君臣 避入海島 遣使請成 皇帝允之 視爲兄弟国 疆土復完 弘立亦還矣 自茲以往 禮遇不替 冠盖交跡 不幸浮議扇動 搆成亂梯 小邦申飭邊臣 言渉不遜 而其文爲使臣所得 皇帝猶寬貸之 不即加兵 乃先降明旨 諭以師期丁寧反覆 不翅若提耳面命 而終未免焉 則小邦君臣之罪 益無所逃矣 皇帝既以大兵圍南漢 而又命偏師 先陷江都 宮嬪王子曁卿士家小 倶被俘獲 皇帝戒諸將 不得擾害 令從官及内侍看護 既而 大霈恩典 小邦君臣及其被獲眷屬 復歸於舊 霜雪變爲陽春 枯旱轉爲時雨 區宇既亡而復存 宗社已絶而還續 環東十數千里 咸囿於生成之澤 此實古昔簡策所稀覯也 於戯盛哉 漢水上流三田渡之南 即皇帝駐蹕之所也 壇塲在焉 我寡君爰命水部 就壇所增而高大之 又伐石以碑之 垂諸永久 以彰夫皇帝之功之德 直與造化而同流也 豈特我小邦 世世而永賴 抑亦大朝之仁聲武誼無遠不服者 未始不基于茲也 顧搴天地之大 畫日月之明 不足以彷彿其萬一 謹載其大略 銘曰
天降霜露 載蕭載育 惟帝則之 竝布威德 皇帝東征 十萬其師 殷殷轟轟 如虎如豼 西蕃窮髪 曁夫北落 執殳前驅 厥靈赫赫 皇帝孔仁 誕降恩言 十行昭回 既嚴且温 始迷不知 自貽伊慼 帝有明命 如寐之覺 我后祗服 相率而歸 匪惟怛威 惟德之依 皇帝嘉之 澤洽禮優 載色載笑 爰束戈矛 何以錫之 駿馬輕裘 都人士女 乃歌乃謳 我后言旋 皇帝之賜 皇帝班師 活我赤子 哀我蕩析 勸我穡事 金甌依舊 翠壇維新 枯骨再肉 寒荄復春 有石巍然 大江之頭 萬載三韓 皇帝之休
嘉善大夫禮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 臣呂爾徴 奉敎篆
資憲大夫漢城府判尹 臣呉竣 奉敎書
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臣李景奭 奉敎撰
崇德四年十二月初八日立
비문의 대략
... 1637년에 우리(조선)가 화친을 깼기에 대방(청)이 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왔다
우리 임금(인조)이 위태로움에 처해 남한산성에 거하신지 50일이 되었다
청태종이 위엄과 법을 베풀도다.
황제의 공덕이 조화와 함께 흐름을 밝히니 우리 소방(조선)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뿐이로다.
처음에 미혹하여 알지를 못하다가 황제의 명이 있으니 잠깨도다
이에 오직 황제의 덕에 의지하도다.
황제가 군사를 돌이켜 다시금 우리에게 농사를 권하니 삼한 말년에 황제의 아름다움이로다.
정묘호란(丁卯胡亂)
1618년 여진족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이 인조 즉위 후 집권한 서인의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으로 1627년(인조 5년)에 침입하자
인조는 부랴부랴 1월25일 강화도로 피신하였으나 결국 강화도 연미정에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배경
정묘호란으로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 평화 유지를 약속했으나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수시의
요구에 응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으로 북쪽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또한 세력이 강해진 태종은 1636년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요구
하자 이에 조선은 강하게 반발함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병자호란의 전개
근왕병의 소집과 실패
1636년 12월 2일(음력), 홍타이지가 이끄는 약 10만의 청군이 압록감을 도하함으로써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이 사실이 한성에 알려진 것은 12월 12일이었는데, 이 때 청군은 이미 개성 근처까지 진출해 있었다. 청군의 침입 소식을 듣고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려 했으나 청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 시간이 부족하자 12월 14일 밤, 남한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납서를 보내 근왕군을 불러모으려 했다. (납서는 작게 쓴 글씨를 밀로 뭉쳐 몰래 전하는 비밀편지를 말한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한성과 인조만을 노린 전격전을 펼쳤기 때문에 한성과 그 주변을 제외한 배후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고, 특히 삼남 지방이 건재했으므로, 여기서 근왕군을 편성해 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역포위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왕군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 김자점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은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에 의해 각개격파 당했고,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했다.
각 근왕군의 동향은 다음과 같았다. 가장 먼저 12월 17일, 강원감사 조정호가 근왕군 약 7000여명을 조직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원주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선봉대 1000여명이 12월 24일 남한산성 근처의 검단산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튿날 청군의 별동대에 의해 격파당했고, 사기가 떨어진 근왕군은 와해되었다. 조정호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가평으로 퇴각, 다른 근왕군과의 합류를 꾀했다.
함경감사 민성휘는 12월 27일 7000여명의 근왕군을 규합, 진군했으나 북병사 서우신과 함경감사 민성휘 사이에 지휘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서우신은 곧장 남한산성으로 진군할 것을 주장했지만 민성휘는 양평의 김자점과 합류한 후에 세력을 키울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민성휘의 의견을 따라 함경도 근왕군은 양평으로 향했지만, 도원수 김자점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북변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또한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2만 3천에 달했지만,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전쟁에서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충청감사 정세규가 납서를 받은 것은 12월 18일이었다. 정세규는 즉시 근왕군을 규합, 12월 25일 공주를 출발하여 1월 2일 남한산성 남쪽의 험천에 당도해 불화살로 남한산성에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청군의 별동대가 험천 서쪽의 고지를 점령 후 근왕군을 요격했다. 근왕군은 10여차례의 공격을 방어하는데는 성공했으나 탄약과 화살이 바닥났고, 지휘관인 김홍익, 이경징, 이상재 등이 다수 전사했으므로 더 이상 성과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청군이 처음 압록강을 건너 한성으로 향하며 통과한 곳이 평안도였다. 당시 평안감사 홍명구는 청군의 압록강 도하 소식을 접하고 병력을 조직 후 평양성 북쪽의 자모산성에 들어가 청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하해 버렸으므로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었다. 홍명구는 평안병사 유림 휘하의 병력을 합세, 1636년 12월 18일 평양을 출발해 남하했으나, 철원, 연천 등지에 이들의 진격을 막기 위해 주둔한 청군의 별동대에 가로막혀 더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1637년 1월 28일 강원도 금화 부근에서 청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홍명구는 전사했고, 유림은 고지에 주둔하면서 공격해온 청군을 격퇴하는데에는 성공했으나, 화살과 탄약등이 떨어져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라감사 이시방은 12월 20일 근왕의 명령을 받았다. 29일 6000여명의 병력을 소집한 그는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전주 군영을 출발, 북상했고, 이어 화엄사의 승병 2000여명이 이에 합류하였다. 선봉을 맡은 김준용은 1월 4일 광교산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이틀 전 충청도 근왕군을 격파한 청군과 조우했다. 1월 5일, 김준영은 청군의 돌격을 막아내고 다음날은 청군 장수 양굴리를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역시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고, 수원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시방이 이끄는 근왕군 본대는, 광교산 전투를 패전으로 오인하고 공주 방면으로 철수해 버렸다.
쌍령 전투
한편,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경상도의 근왕군은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총 규모 약 4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속오군 편제상 총병력 4만이 모두 집결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8000여명 이상의 병력은 1637년 1월 3일 광주의 쌍령 근처까지 진출했다.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인근의 불당리에 매복하고 있던 청군은 300여기의 기병과 천여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부대였다. 조선군의 대부분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훈련도는 매우 낮았고, 청군 기병대의 돌격에 겁을 먹은 병력이 거리를 재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격한 끝에 화약과 화살을 전부 소모하게 된다. 청군은 일단 후퇴 후 조선군의 화약이 소모된 것을 확인하고 재차 돌격을 감행. 허완이 이끄는 좌군은 완전히 와해되고 허완 역시 전사했다. 민영이 이끄는 우군은 좌군이 패주하는 와중에도 분투했으나, 화약이 떨어져 이를 재보급하던 도중 화약이 폭발, 군사 수십이 폭사하고 전선이 무너져 버렸다. 이를 틈탄 청군 기병이 총공격하자 우군 역시 완전히 붕괴했고, 민영도 이 와중 전사했다.
결국 경상도 근왕군은 청군의 몇 배에 이르는 우월한 병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참패하고 말았고,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진을 치고 있던 심연은 선봉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렇게 8도의 근왕군이 전부 청군에 의해 각개격파 당함으로써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더 이상의 근왕군은 조직되지 못하였다.
기근과 굶주림
청군이 기병 중심의 편제였던데다 그 진격 속도가 워낙 빨랐으므로, 전국 각지에 청나라 군사는 바람같이 나타나 귀신같이 사라진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조선군은 임진왜
란과 병자호란의 경험을 토대로 전략적 요지에 축성된 산성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농성 전술을 구사하려 했지만 팔기군을 중심으로한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한성을 향했고, 각지의 근왕군 또한 청군의 별동대에 각개격파 당함으로써 조선군은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입증했을 뿐이었다. 인조는 근왕군 후퇴에 당황했으며 청나라 군사를 피해 후퇴하는 군사를 처벌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이것이 조선군의 청군에 대한 공포감과 무력감을 없애지는 못했다.
또한 조선군은 애초에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남한산성으로 퇴각한 것이었으므로 성 내부로 퇴각한 1만 2천의 군사와 수만의 백성들을 지탱할 수 있는 비축물자가 없었다. 쌍령 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으므로 더 이상의 보급을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겨울철의 혹심한 추위로 인한 동사자가 다수 발생했으며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왕인 인조조차 죽 한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결국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1월 10일 전쟁을 끝내기 위해 청군과의 협상을 시작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김상헌을 필두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청군은 인근의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내부를 직접 조준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조선군은 반격을 시도, 천자총통을 이용해 홍이포가 설치된 포대에 포격을 가하기도 했으나, 이 역시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성벽을 공격했고, 직접적인 피해는 경미하였으나,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1월 22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 소식은 1월 25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조선군의 항전 의지는 이것으로써 결정적으로 꺾이고 말았다. 결국 1월 28일, 인조는 항복을 결정했고, 1월 30일, 59일간 버티던 남한산성에서 나오게 되었다.
정축화약(丁丑和約)-항복의 조건 11가지
1) 명나라의 고명(誥命:황제의 명령서), 책인(冊印:책봉 문서와 도장)을 청나라 황제에게 바칠 것
2) 명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을 것
3)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할 것
4) 세자와 왕자 및 대신의 자제를 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5)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병을 파병할 것
6) 청나라가 가도를 공격할 때 원병을 파병할 것
7)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것
8) 조선인 포로가 도망쳐 오면, 즉시 심양으로 돌려보낼 것
9) 두 나라 신하들의 통혼을 장려하여 우의를 돈독히 할 것
10) 성을 새로 쌓거나 개축하지 말 것
11) 매년 세폐(歲幣)를 보낼 것
항복
항복문서
“臣(仁祖)은 장차 300년의 종묘사직과 수 천리의 생령(生靈)을 폐하께 의탁하고자 합니다.
정리(情理)가 참으로 가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만의 하나라도 일에 차질이 생긴다면 칼을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과 같지 못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거룩한 은혜로서 신의 충정을 굽어 살피셔서 안심하고 복귀할 길을 열어 주십시오”
1월 30일 인조는 묘시(오전 5시~7시) 무렵 세자 및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고 서문을 빠져나와 청태종의 지휘 본부가 있던 삼전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항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하성이라는 용어를 쓰도록 했다. 처음, 청군은 항복 의식으로서 반합(飯哈)을 요구했다. 이는 마치 장례를 치르듯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항복'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타협에는 성공했지만, 이 또한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도록 하는 굴욕적인 의식이었다.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의 어가는 한강을 건너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했고, 공식적으로 청에 항복했다. 임금이 오랑캐라 여기던 만주족 군대에 굴복했다는 것은 소중화를 자처하며 중화의 도를 계승하였다고 자부하던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복을 기념해 삼전도에 기념비를 세우도록 했다.
1637년 강화조약의 결과로 소현세자와 부인강씨,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 김상헌 등의 신하들이 청나라 선양으로 압송되었다.
1639년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1640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의 명군을 공격하기 위해 임경업을 수장으로 한 군사 6천 명을 파견했으나 실패했고, 임경업은 1643년 명에 투항했다. 임경업은 명나라 등주 도독 황룡을 통해 숭정제로부터 부총병의 직위를 하사받았으나 이미 시세는 기울어 그 직후 북경은 함락되고 청태종이 산해관에 입성했다. 명은 남경으로 도망쳐 남명 정권을 세웠으나 이마저도 곧 토벌당했고, 임경업은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1645년 청나라에 볼모로 억류되었던 소현세자가 귀국하나, 귀국 후 2개월 만에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자빈 강씨는 그 직후 사사되었으며,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이후 효종으로 즉위하게 된다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1649년에 즉위한 효종의 주도 아래 강한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었는데1659년 효종이 갑자기 서거함으로써 북벌계획은 중단되었다.
(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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