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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충남 공주) 계룡산의 가을-1(백제의 고찰 신원사(新元寺))

백제의 천년 고찰 신원사(新元寺)

 

 

언제: 2011-10-12(수요일)

어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누구: 혼자

 

 

겹 입히는 일상을 벗어나

가을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계룡산을 찾아 새벽길을 나섰다.

 

 

06:50

인천 종합 버스터미널에서 공주行 첫차는 고속도로 천안IC를 벗어나 지방도로를 달리는 동안

황금 물결 넘치는 들녘과 공주의 특산물인 산비탈의 밤나무 알밤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08:50

공주 버스터미널 도착

점심으로 김밥을 준비하고

신원사를 둘러본 후 계룡산 연천봉-관음봉-자연성능-삼불봉-남매탑-동학사로 가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신원사까지 택시를 이용했다.

공주 버스터미널에서 금강을 건너 고즈넉한 아침 시골 길을 달리는 기분

그 기분 누가 알까?

이따금 나타나는 저수지의 물안개 속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 그리고 물기를 머금은 채소들

정말

신선한 기분으로 달리다 보니 어느새 신원사 입구라네.

 

09:20

신원사 도착

계룡산 동쪽에는 동학사, 서쪽은 갑사의 큰 사찰이 자리하여 입구에는 세상의 때가 잔뜩 묻어 있는데  

남쪽의 신원사는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소박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정말 좋았다.

 

택시를 탄 이유로

마침

중악단에서는 산신제를 올리고 있어 특별한 볼거리였고 여유스럽게 신원사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신원사 입구  

 

 

 

 

사천왕문 

 

 

계룡산 천황봉과 쌀개봉이 신원사를 내려다 보고 있다.

  

대웅전과 좌측의 독성각

 

 

무학대화상, 보덕대화상, 도선대화상 영정들

  

 

  

 오층석탑

대웅전 앞 마당은 다른 절과 다르게 잔디로 조성되어 인상적이다.

[신원사 영원전(靈源殿)..]


영원전은 대웅전 앞마당의 동쪽에 서향해 위치하고 있다.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신 건물로 명부전에 해당한다. 조선 왕실과 관련된 건물로 영원전이라는 전각의 명칭은 다른 사찰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신원사만의 특징이다. 영원전의 창건은 조선 태조 3년(1394년) 무학대사가 신원사를 중창하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영원전은 1982년에 원융스님에 의해 조영된 것이다. 정면 어간의 ‘靈源殿’이라 쓴 현판에는 ‘辛卯’라는 간지(干支)가 명기(銘記)되어 있는데, 1891년에 해당한다.


고종 13년(1876년)에 보련(寶蓮)화상이 중건하고 고종 22년(1885년)에 관찰사 심상훈이 중수한 후에 씌어진 것으로 1982년에 영원전을 새로이 중건하면서 옛 현판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2층의 축대 위에 지었으며,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2간이다. 정면 3간에는 모든 간에 걸쳐 띠살의 사분합문을 달았고, 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을 들였다. 원통형의 다듬돌 초석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양 측면 중앙의 것이 방주인 것을 제외하면 모두 원주로 세장한 편이며 흘림을 두지 않았다.

   

계룡선원 

 

범종각 

 

 

  

 

 

 

 

 

 

 

중악단은 신원사의 동쪽에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며 위치하고 있다.

묘향산의 상악단,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왕실의 기도처로서 중악단은 조선 고종 16년(1879년)에 설치하였다. 중악단은 중악전(中嶽殿) 또는 계룡단(鷄龍壇)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 초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이성계가 창건을 명했다고 한다. 효종 2년(1651년)에 이르러 제단이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1879년)에 명성왕후의 명에 의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왕조의 몰락과 함께 왕실 주도의 제사 의식은 중단되었고, 현재는 신원사에서 불교식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중악단은 서남향으로 신원사와는 좌향을 다르게 하였다. 신원사가 계룡산의 연천봉을 주산으로 삼은 반면 중악단은 계룡산 정상인 천왕봉을 주산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중악단은 대문간채와 중문간채, 중악단 본전을 일직선 축선상에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일직선 축과 좌우대칭에 의한 배치로 인해 단묘 건축으로서의 엄숙함과 건물간의 위계를 느낄 수 있다.

 

 

 

대문간채는 중앙 한 간의 지붕을 높게 한 솟을삼문 형식으로 전면은 7간이다.

중앙의 3간을 문으로 하였고, 좌우의 2간은 관리를 위한 건물로 뒤쪽으로 꺾여 2간이 연장된다.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과 익사 및 담장으로 둘러싸인 마당이며, 마당 뒤쪽에는 다시 중문을 두었다. 중문은 정면 5간으로 중앙의 3간에 문을 설치했으며, 좌우에 온돌방 1간씩을 들였다. 중문을 들어서면 담장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뒤편에 중앙단 본전이 있다. 중악단 본전은 고종 16년(1879년) 단주화상(丹珠和尙)이 중건하였으며,


명성황후도 이곳에 와서 친히 기도를 올린 바 있다고 전해진다. 정면 어간에는 흰 바탕에 검은 색으로 ‘中嶽壇’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그 한편에 ‘辛卯直指御史 李重夏書’라는 기명이 있다. 신묘는 고종 28년(1891년)이다. 왕실에서 이중하를 내려보내 직접 편액을 쓰게 한 것이다. 내부에는 목판에 음각한 ‘懸板謄文’이 있는데, 고종 29년(1892년)에 쓴 것이다

 

 

 

 

 

 

 

 

 

 

 

신원사 계곡은 신령스러운 계룡산 자락 중 가장 영험한 기운이 서려있는 곳이다. 무속인들이 유독 많이 찾는 곳이다.

계룡의 신령스러움을 대표하는 곳이 바로 신원사 경내에 있는 중악단이다. 계룡산에선 국가가 나서서 산신제를 지냈다. 신라 때는 5악중 하나로 계룡산을 중히 여겼고, 조선 때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여기고,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이라 해 단을 세우고 산신제를 모셨다. 이중 현존하는 것은 중악단 하나뿐인데 지금 신원사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이곳에서 제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됐다가 고종 16년(1879)에 지금의 건물이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지어졌다. 중악단을 새로 지어야만 했던 명성황후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스러져가는 조선의 운명을 산신의 힘에나마 기대고 싶은 애절한 염원이 스며있는 건물이다. 중악단 건물 안에는 인자한 표정의 산신 할아버지가 그려져 있다.

신원사 소개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계룡산(鷄龍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신원사(新元寺)는 신원사(新院寺) 또는 신정사(神正寺)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신원사(新元寺)로 부르기 이전에는 주로 신원사(新院寺)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귀신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신원사가 계룡산신과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신라 때 계룡산이 오악의 하나로 여겼고, 조선시대에는 중악으로 여기고 계룡산사와 중악단을 설치한 것 역시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원사는 651년(의자왕 11)에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 보덕(普德)이 창건하였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이곳을 지나다가 법당만 남아 있던 절을 중창하였고, 고려 성종대인 984년에는 여철(如哲)화상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충렬왕 24년(1298년)에는 부암(浮庵)화상 무기(無寄)가 다시 중건하였다고 한다.조선 태조 3년(1394년)에는 무학(無學)대사가 크게 중창하면서 영원전을 지었다. 인조 22년(1644년)에 주지 삼욱(三旭) 스님의 증명 아래 괘불(국보 299호)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신원사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조선 고종 13년(1876년)에 보련(寶蓮)화상이 중건하면서부터이다.

그 3년 후인 고종 16년(1879년)에는 신원사 동쪽에 계룡산 중악단을 설치하여 묘향산의 상악단,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왕실의 기도처가 되었다. 고종 22년(1885년)에는 관찰사 심상훈(沈相薰)이 중수하고 어수선한 나라가 일신(一新)하여 신기원(新紀元)을 이루라는 의미에서 ‘新元寺’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로서 신원사(新院寺)라 부르던 절의 이름이 신원사(新元寺)로 바뀌게 되었다.  

 

계룡산 동서남북 4대 사찰 중 남사(南寺)에 속하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향각(香閣)·영원전·대방(大方)·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八作)집이며, 내부에는 아미타불이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또 향각의 불상은 명성황후가 봉안한 것이라고 전한다. 

 

 문화재로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인 오층석탑과 부도가 있다. 오층석탑은 여래사리탑(如來舍利塔)으로 신라 말 고려 초의 양식을 띠고 있으며, 상층 일부가 없어지고 4층만 남아 있다. 1975년의 보수공사 때 1층 탑신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구(舍利具)와 함께 개원통보(開元通寶)·함원평보(咸元平寶)·황송통보(皇宋通寶)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고려시대의 것이다. 

이 밖에도 대웅전에서 동쪽 약 50m 거리에는 이 절에서 관리하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인 계룡산 중악단(中嶽壇)이 있다. 본래는 계룡산의 산신제단(山神祭壇), 즉 계룡단이었던 것이 조선 말 고종 때 묘향산에 상악단(上嶽壇), 지리산에 하악단(下嶽壇)을 두고 있었으므로 중악단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때는 중사례(中祀禮)로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에는 향전(香奠:초상집에 부조로 내는 돈이나 물품)을 올릴 뿐이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 팔작집으로 조선 말기 건축 중 우수한 것이다. 우리 나라 산악신앙의 제단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중악단의 경역은 612㎡로 둘레에 축담을 둘렀고 전면에 이중의 내외문(內外門)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고왕암(古王庵)·등운암(騰雲庵)·마명암(馬鳴庵)·남암(南庵)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고왕암은 660년(의자왕 21)에 창건하였고, 1419년(세종 1)에 중건하였으며, 1928년 청운(淸雲)이 또다시 중건하였다. 암자의 이름을 고왕이라고 한 것은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과 합세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백제의 왕자 융(隆)이 피난했다가 이곳에서 신라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