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의 가을-3(동학사(東鶴寺)와 남매탑)
언제였던가?
늦은 가을
갑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용문폭포와 진달래 고개를 넘어 남매탑을 거쳐 동학사를 둘러본 적이 있었는데
아마
4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20년이 지나 남매탑을 찾으니 탑은 옛 과 다름없는데
그때 생동감 넘치던 모습은 간데없고 검었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서리가 내려 있고
얼굴은 세월의 흔적에 몸살을 앓고 있다.
15:40
남매탑 도착
남매탑을 바라보며
남매탑 옆의 상원사
동학사 계곡
동학사(東鶴寺) 입구와 홍살문
왜 홍살문이 서 있을까?
그 이유는 동학사와 담장을 두고 붙어있는 초혼각 때문이다.
초혼각지란 단종과 사육신, 생육신등 충신들과 정몽주, 길재, 이색등 충신 349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세진정
초혼각(招魂閣)
동학사(東鶴寺)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 동쪽 기슭에 있는 절.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724년(신라 성덕왕 23) 상원조사(上願祖師)가 암자를 지은 곳에 회의화상(懷義和尙)이 절을 창건해 상원사(上願寺)라 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유거달(柳車達)이 이곳에 와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절을 지으니 승려들이 모여들어 사찰이 커지면서 이름을 동학사로 바꾸었다. 1394년(태조 3) 고려의 유신 길재(吉再)가 고려 태조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고, 1457년(세조 3)에는 김시습(金時習)이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는데, 다음해 이곳에 들른 세조가 단종을 비롯해 세조찬위 때 억울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인신(印信)과 토지 등을 하사했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모두 소실된 것을 1814년(순조 14) 월인선사(月印禪師)가 예조에 상소하여 중건했고, 1864년(고종 1) 보선국사(普善國師)가 옛 건물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2칸을 지었다. 1904년 초혼각을 숙모전(肅慕殿)이라고 개칭했다.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5년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무량수각·삼은각·숙모전·범종각·동학사·동학강원 등이 있는데
동학강원은 운문사의 강원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비구니수련도량으로 유명하다.
동학사 전경
마침 도로 보수중이라 작업차도 보인다.
동학사 대웅전
동학사 종각
동학사 비구니와 계룡산 쌀개봉
동학사 부도군
동학사 입구의 암자들
바위위에서 자라는 나무
동학사 가는 길
동학사 일주문
산행후기
마침내 신원사에서 출발- 연천봉- 관음봉- 자연성능- 삼불봉- 남매탑- 동학사까지 약13km의 산행을 약 8시간에 걸쳐 무사히 마쳤다. 신원사를 둘러보고 또 중악단에서 산신제를 모시는 것과 암자들과 동학사를 보다보니 시간은 많이 소요되었으나 의미있었던 산행이었다. 계룡산(845.1m)은 삼국시대부터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천하의 명산으로서 대전시 유성구와 공주시 반포·계룡면과 논산시 두마면 사이에 있다. 계룡산이라는 산 이름이 갖는 의미는 조선조 초기에 이태조가 신도안(계룡시 남선면 일대)에 도읍을 정하려고 이 지역을 답사하였을 당시 동행한 무학대사가 산의 형국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 일컬었는데, 여기서 두 주체인 계(鷄)와 용(龍)을 따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백두대간중 금남정맥의 끝부분에 위치한 계룡산은 845.1m의 천황봉을 중심으로 관음봉, 연천봉, 삼불봉 등 28개의 봉우리와 동학사계곡, 갑사계곡등 7개소의 계곡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자태와 경관이 매우 뛰어나 삼국시대에는 백제를 대표하는 산으로 널리 중국까지 알려졌으며, 신라통일 후에는 오악(五嶽)중 서악(西嶽)으로 조선시대에는 삼악(三嶽)중 중악(中嶽)으로 봉해질 정도로 이미 역사에서 검증된 명산이다. 계룡산은 백제가 475년 웅진성으로 천도하고, 그 이후에도 가까운 사비성으로 천도했어도 자주 교류하던 중국 사신들의 입소문에 힘입은바 크지만(2011.6.1 자 계룡산 참조), 무엇보다도 나말여초부터 유행했던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2011.9.14.자 마곡사 참조). 즉, 계룡산은 난세에 병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중 하나로 알려졌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 대사의 천거로 계룡산 남쪽 기슭인 신도안에 도읍지를 정하고 1년 가까이 공사를 하다가 황희, 정도전 등 성리학자들의 반대로 한양으로 옮겼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 후 600년이 지난 3공화국 시대에 신도안은 다시 천도설이 떠돌다가 대통령이 시해된 이후 시들해지고 삼군본부(계룡대)가 이전했지만, 지척에 행정도시가 건설된 것도 예삿일은 아니라 할 것이다. 계룡산은 지리산에 이어 1968.12.31에 두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 관리되어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공주시에 주로 위치하면서 일부가 대전광역시와 논산시, 계룡시에 위치하고 동학사, 갑사, 신원사 등의 고찰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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