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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詩 감상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數千 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이 시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알려진 샤갈의 그림 ‘나와 마을’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그리고  김춘수 시인은 이 시를 쓸 무렵 '의미는 산문에 어울리고, 무의미는 시의 형식에만 알맞다'며 순전히 이미지의 전달만을 추구하는 무의미시를 주로 썼다. 초현실과 무의미가 만나고 설원의 러시아가 고향인 샤갈과 쪽빛 바다의 통영이 고향인 김춘수가 만났으니 얼핏 난해하고 골 때리는 시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시인의 말마따나 전달하고자하는 의미가 없으니 골똘히 생각하며 감상해야할 근거는 애당초 없는 셈이다. 그저 시를 읽으며 각자가 느끼는 대로 환상하고 상상하며 심상을 그리면 되는 것이지 더 이상의 감상적 태도는 그야말로 무의미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 경우 그제 내린 3월의 폭설과 아마도 어제 하루 가장 많이 팔려나갔지 싶은 이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인간 존재의 신비함과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느낄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차에 두껍게 내려앉은 눈을 털어내고 윈도우브러시의 팔을 공중으로 잠시 들어 올리는 동안 세상의 모든 관념과 의미도 지웠다. 주차장에 서있는 고급승용차 위에나 노란 음식물 쓰레기통 위에나 고루 차별 없이 눈의 미립자가 쌓여 물질은 해체되고 없었다.

 

 다만 그 눈을 뒤집어쓰고도 소멸하지 않은 것은 인간과 자연뿐. 시에서처럼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람들에게 ‘눈은 數千 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마지막 겨울의 찌꺼기와 때 묻고 얼룩진 마음을 발목까지 지운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3월의 눈은 보너스 차원에서 낭만을 서비스한 것이 아니라 마치 아득한 묵음의 논어처럼 내렸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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