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궁지에는 조선시대 흔적만 남아 있었다.
용흥궁을 보고 성공회성당을 둘러본 뒤 조금 비탈길을 오르면 고려궁지가 나온다.
입장료 900원.
남한에는 고려 유적지가 별로 없음에 설레이는 기대감으로
정문인 승평문을 들어서니
넓은 공터에 건물 몇 체가 보이고 산 아래가 파 헤져 있어 고려궁지를 발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관을 가지고 방문한 국민에게 보존물이나 시설면에서 입장료까지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무료입장을 시켜도 다시 가고 싶을 이유가 없음에도 입장료까지 받는 강화군의 행정에 실망을 감출 수 없었으며
고려 궁터에는 고려 흔적은 없고 조선 흔적만 보고 왔다.
강화도의 고려 유적들 강화에는 고려 역사를 보여주는 유적들이 많다.<지도 참고> 고려궁지·강화산성·홍릉(고려 고종의 능)·삼별초호국비·선원사지(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곳으로 알려짐)·이규보묘 등이 대표적이다.
몽골의 침략에 시달리던 고려는 1232년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과 맞선다. 섬 주변의 해안선이 복잡하고 물살이 험해 해상 전투 경험이 별로 없는 몽골군의 저항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1270년까지 강화는 고려 수도 역할을 한다. '강도(江都) 39년'의 역사가 펼쳐진 것이다.
강화도 북쪽에 위치한 고려궁지는 고려 왕들이 머물렀던 궁궐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오랫동안 외규장각 등 조선시대 유적이 더 눈에 띄었다. 고려 궁궐과 관련된 증거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고 고려 역사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기 때문이다. 지난 2009년 궁지에서 청자류와 기와류 등 고려시대 유물이 발견됐으며 고려시대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해주는 석축이나 석단도 드러났다.
강화산성은 몽골의 침입에 항전하기 위해 지어졌다. 궁궐을 둘러싼 성 주위로 다시 성을 쌓고 강화 동쪽을 따라 외성이 구축됐다. 고려궁궐과 강화산성은 1270년 몽골과 화친을 맺으며 허물어졌다. 고려사에는 "강화산성이 무너질 때 모두 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초 성을 쌓지 않았던 것만 못했다고 병사들이 울부짖었다"는 내용이 있다.
선원사지는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팔만대장경은 국보 32호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몽골군에 항전하다 제주도로 옮겨간 삼별초의 호국비도 강화에 있다.
당시 실권자였던 무신 최우의 협박에 천도를 결정해야만 했던 비운의 왕인 고려 23대 고종의 능 '홍릉'을 비롯해 희종의 석릉, 왕비의 능인 곤릉·가릉도 있다. '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을 저술한 고려시대 학자 이규보는 말년을 강화에서 지내다 묻혔다.
고려궁지의 정문 승펴운(昇平門 )
江華留守府 東軒(강화유수부 동헌, 유형문화재 제 25호)은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留守(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인조 16년(1638)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고, 영조 45년(1769) 유수 황경원이
顯允觀(현윤관)이라 하였고, 明威軒(명위헌)이라는 현판은 영조 대 명필인
백하 尹淳(윤순)이 쓴 것이라 한다.
건물 구조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단층집으로 1977년 정비되었다.
철따라 가을은 남자들의 가슴을 시리게 하며 다가온다.
고려궁지
고려 고종 19년에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가 강화로 옮겨져(1232) 그후 39년간 사용했으나 이후 고려왕실은 원종 11년에 몽고와 화의를 맺고 개성으로 환도한다.
이처럼 고려궁지는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8년간의 궁궐터로 1232년 6월 고려 고종 당시 항몽의 기치를 들고 강화에 도읍을 옮긴 후 2년 뒤인1234년에 관아와 궁궐의 규모가 완성되었다.
당시 불교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이 이 곳 강화에서 만들어졌고, 금속 활자도 개발되었는데, 1270년 5월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하면서 성과 궁궐이 무너졌다.
조선시대에는 행궁이 있었고 1637년 병자호란시에는 강화성이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어 치욕을 당하였다.
그 후 고려궁터에는 강화유수부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현재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다. 동헌은 강화유수부의 건물로서 1638년 인조 16년에 건립되었다. 이방청은 1654년 효종 5년 강화부에서 건립한 관아로서, 1783년 정조 때에 개수한 ㄷ자형의 건물로 크기는 79평 정도이다. 현재의 고려궁터는 1977년에 보수 정화한 것이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현재는 고려시대 당시의 유적은 남아 있지 않고, 조선시대 건물인 승평문, 강화유수부 동헌, 이방청, 종각, 외규장각 등이 복원되어 있다.
1964년 이곳은 사적 제133호 '高麗宮址(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보수 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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